五園 장승업
(1843-1897)
오원 장승업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 화가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조선시대의
수많은 빼어난 화가들 중에서도 3대 혹은 4대 화가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3대 화가라면 안견(安堅)ㆍ김홍도(金弘道)와 장승업을, 4대 화가
라면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일컫는다. 그리고 장승업은 이들 중에서도 가장
현대와 시대적으로 가까운 19세기 후반을 살다간 인물이다.
위에서든 화가들을 3대 혹은 4대 화가로 지칭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거대한 예술적 업적과 영향력 때문이다. 조선 초기 세종(世宗) 연간의 찬란한
문화 중 회화 예술을 대표하는 안견, 조선 후기 영조(英祖)ㆍ정조대(正祖代)
문예 부흥 이후의 회화 예술을 대표하는 김홍도와 정선은 제각기 우리 회화사
에서 크나 큰 업적을 남겼다.
안견은 조선 초기를 풍미한 소위 안견파 화풍의 창시자로서 그의 영향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에 까지 미쳤다. 조선 후기의 김홍도는 당시의 사실
주의적이고 진취적인 국가 기상을 반영하는 건강하고 화려하며 다양한 회화적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회화사의 주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진경 산수화를 대성한 정선도
기세가 넘치는 필법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오늘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해 준다.
오원 장승업은 시기적으로 이들 대가들 중 현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활약한
화가이다. 그는 조선 왕조가 500년의 긴 역사를 타의에 의해 마감해 가는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 당시 조선 왕조는 내부의 모순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근성을 배운 일본과 시대적 추세를 거스른 완고한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의 열강의 침략 속에서 내부 개혁의 의지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몰락해 갔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500년을 지속한 문화대국(文化大國)답게 내부적
으로는 풍부한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었으니, 장승업의 회화는 바로 그런 문화 대국
조선 왕조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듯이 배출한 천재 화가이다.
오원 장승업의 회화적 업적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중국적인 소재를 많이
다룬 점,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안목이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오해 등으로
인해 비판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문학ㆍ예술 전반의 소재는
대부분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며, 또한 진정한 예술가의 성취에서 꼭 시사적인
성격이 가미된 정치와 철학의 풍모가 있어야만 하는가? 오히려 가장 최고의 예술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모든 현세적인 것을 초월한 진정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 오원 장승업은 바로 그런 진정한 동양 예술 정신의 진수를 체득한 화가였다.
그리고 진정한 프로정신으로 자신을 연마하여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기량과 넘치는
신운(神韻)으로 19세기 동아시아 회화 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더구나 그가 활동
했던 시대는 당시 조선인에게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런 속에서 피어난 예술
이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모든 진정한 예술가가 그렇듯이 장승업도 금새 당시 예술계의 총아가 되었으며,
위로는 고종 황제와 엘리트 지배 관료로 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이름 없는 부호에
이르기 까지 기꺼이 그의 후원자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궁중에서 그림을 그려 바치
라는 임금의 어명을 여러 차례 어기는 기행(奇行)에 조차 면죄부를 준 것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예술 혼의 덕분이었다.
장승업이 당대를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오직 술과 예술 속에 살다가 뜬 구름
처럼 간것은 어쩌면 무너져 가는 조선 왕조와 당시 대인에 대한 치열한 무언(無言)의
거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1897년 무너지기 직전의 조선 왕조가 형식적 독립을
선포하는 광무원년(光武元年) 홀연히 세상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원 장승업의 회화는 아직 상당수가 남아 진정한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 미술 이념이 지배하는 현대 한국에서 동양의 풍토위에
진정한 전통을 되살리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화ㆍ인물화ㆍ동물화ㆍ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등 아주 다양
하며, 이 여러 종류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린
것이 화조화ㆍ동물화ㆍ기명절지화이며, 산수화와 인물화는 상대적으로 적다. 장승업이
많이 그린 화조화ㆍ동물화ㆍ기명절지화는 형태상 병풍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아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장승업의 회화를 양식적으로 볼 때, 한마디로 전통 화법과 외래 화법을 종합 절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승업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 우리
나라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래 상당히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화풍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백은배
(白殷培, 1820∼1900)ㆍ이학철(李漢喆, 1812∼1893)ㆍ유숙(劉淑, 1827∼1873) 등이며,
이 중 유숙은 장승업의 초년 스승이었다고 전해 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그 이전,
즉 18세기의 중국 양주팔괴(楊洲八怪)의 화풍이 이미 유입되어 있었고, 또 당시 중국의
신 화풍도 수입되고 있었다. 새로 수입된 신 화풍이란 당시 번창했던 신흥 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조지겸(趙之謙)ㆍ임백년(任伯年)ㆍ오창석(吳昌碩) 등 소위 해상파
(海上派)와 광동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거소(居巢)와 거렴(居廉) 형제 등의 초기 영남
학파(嶺南學派)의 화풍을 말한다.
그러나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위대성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독자적 경지를 이룬 데
있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는 필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백묘법(白描法),
정묘하고 아름다운 공필(工筆) 채색 화법, 이와는 정반대인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파묵법(破墨法), 근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신선한 선염 담채법,
그리고 최후에 이룩한 깊은 정신미가 깃든 수묵 사의화법(寫意畵法) 등을 들 수 있다.
장승업은 조선 후기의 대 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
(五園)으로 자기 호를 지었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神韻)이 생동
(生動)한다고 자부 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자부심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내적 자신감의 표현이며, 이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안견(安堅)ㆍ김홍도(金弘道)와 함께 한국 회화사상 진정한 대가의
반열에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회화는 초월적 예술 정신의 발현이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으로서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거지 왕초
속 치마에 그린 매화
강아지
소운 초상화
부 채
수선 매작도
삼인문도
청강리어
추금서지
호응탐시
대나무와 닭
연지쌍압도
오동 나무를 닦고있는 모습
호취도
매화 병풍
녹수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