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튼가의 5대를 잇는 한국사
유진벨 선교사와 린튼네 사람들
유진 벨 목사(1868~1925,사진)는 1895년 남장로교의 목사로서 최초로 조선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서울 정동에는 1884년 알렌을 시작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펴고 있었다. '배유지'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유진 벨 목사는 1898년 전라남도 목포, 나주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유진 벨 목사는 주로 교육과 의료, 교회 사역에 중점을 두어 목포에 정명학교(현 정명여중), 영흥학교를 세우고, 광주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학교를 세웠다. 린튼 소장의 할머니 샤롯은 유진벨 목사의 둘째딸이다. 1899년에 목포 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가 1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 당시 한국의 유아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는데, 어머니의 소천으로 인해 샤롯이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내게 되면서 살 수 있었다. 샤롯이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였고, 그 당시 선교를 위해 1912년 군산에 도착한 윌리암 린튼(당시 21세)을 만났다. 윌리암 린튼과 샤롯 벨은 일본에서 결혼을 한 뒤, 다시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 했다. 윌리암 린튼(1891~1960)은 교육 선교사로서 전주, 이리, 군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윌리암이 최초로 교장으로 시무했던 학교가 전주 기전 여고였고, 1930~1937년에는 신흥남고 교장으로 몸담았다. 당시 남장로교는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시골에서 전라도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문화적으로 조선을 인정하면서 사회 참여보다는 교육과 의료 선교에 중심을 두었다. 정치에 관한 내부 간섭은 피했으나, 북장로교가 그리 문제시 하지 않았던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1937년 윌리암 린튼(한국명:인돈)도 남장로교 선교사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결국 당시 윌리암이 교장으로 복직했던 신흥고가 폐교 조치를 당하게 되고, 윌리암도 강제출국 당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한국을 다시 찾은 윌리암은 1956년, 대전에 대학교를 건립한다. 건축을 전공하여 건축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졌던 윌리암은 직접 건축을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 남장로교단의 지원과 윌리암 선교사의 노력으로 마침내 1957년 “대전대학교”을 세운다. 그것이 1971년 서울의 숭실대학교와 통합하여 “숭전대학교”가 되었고, 1983년 다시 분리되어 지금의 한남대학교와 숭실대학교가 되었다. 윌리암 린튼과 샤롯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은 1926년 군산에서 출생했다. 휴 린튼은 아버지의 성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인 휴라는 한국 이름을 가졌다. 휴 린튼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외조부와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를 이어간다. 해군 장교로 2차 대전에도 참전 했던 휴 린튼은 6·25때 인천 상륙 작전에도 참전했다. 휴 린튼 부부는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 일대를 돌며 선교를 하였다. 전남에 교회들을 세우고, 농촌 사람들이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그 거리를 좁히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이처럼 유진 벨과 그의 사위와 외손자로 이어진 그들의 선교는 도시보다는 시골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휴 린튼와 로이스 린튼 부부가 살던 1960년대 전남 순천에는 큰 수해가 있었다. 수해 때문에 결핵이 유행하게 되었으나, 그 당시 병원이 없어서 3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광주 제중병원까지 환자들을 옮겨야 했다. 자연히 이송 과정에서 죽는 사람이 많았고, 그의 세 아들도 당시 결핵을 앓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로이스 린튼(한국명:인애자)은 1964년 순천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개설한다. 그 후로 1994년 은퇴할 때 까지 순천결핵재활 원장으로 35년간 결핵 퇴치운동을 벌였다. 로이스 린튼은 1996년 호암봉사상을 수상했는데, 그 상금 5천만원으로 구급차를 구입해 북한에 기증하였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5남 1녀 자녀 중 스티브 린튼(둘째)과 존린튼 (막내)은 부모님이 한국에서 결핵 돕기에 앞장섰던 것처럼 현재 또하나 한국, 북한의 결핵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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