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 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될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 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
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 전시관과 기념 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 장수 하셨던 아버님을 보필하시는 중에 그
생활이나 식사 관리, 건강상의 비결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듯 싶은데요.'하고 조르는 바람에
나의 두서없는 말을 며느리가 받아 쓰기로 하여 이글을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으로 부터 55년전 1933년에 내가 리박사를 처음 만나게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반에 있던 호텔 '드 라 뤼씨'의 식당이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빠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당시 리박사는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있던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학정을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 동포들의 애절한 입장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방송 시설을 이용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
된다'고 역설하며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는등 각방으로 활약중이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 저녁 식사를 하려고 4인용의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리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
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락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리박사의 첫 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뒤 앞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워크라푸트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
그것이 주문한 메뉴의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 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 골라 주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
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 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오는 서양 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
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 전에 불어로 '본
아뻬띠' (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
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마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은 힘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기 직전에 우리 독서 클럽에서 보내주어 읽어있던 <코리아>라는
책 속의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한국 말이 생각났다. 내가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하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이나 놀라면서
반가와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을 알아주는 외국인이 드물었고, 또 알아도 일본의 악 선전
으로 잘못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자기 조국 '코리아'를 그것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무척 기쁘게 한것 같았다.
그때 지배인이 베른에서 온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그 분은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다음날 나는 신문에 실린 그분의 사진과 신문 한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
될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나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서 내 이름은 쓰지 않은 채 그분에게 전해 달라고 호텔 안내에게 맡겼다.
그런데 답장이 왔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리승만.'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 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차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
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정식 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줄 몰랐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 투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면서도 외로운 한국 독립 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세 딸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하여 사업을 계승 시키려고 나를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언어 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가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연마해온 나의 특기를
가지고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이 항일 독립 투사를 위해 무료 봉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어머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한국의 애국자에게 마음을 쓰며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더우기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 대용으로
날 달걀에다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 운동을 하고 있는 저명 인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예정을 앞당겨 곧바로 나를 데리고 빈(Wien)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분과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몰래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 맛나는 사워크라푸트 한 병을 그분에게 전해 주도록 호텔 고용인
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후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회사를 수신처로 하여
제네바의 그분과 서신 연락을 했다. 바로 그 해 7월초 모스크바로 가는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리박사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한국의 독립 문제로 만날 사람이 많아 늘 바빴고 나도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빈의 명소와 아름답고
시적인 숲속을 거닐기도 했다.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동양 신사라 아무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했더니,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을 보내게 되다니'하며 회한섞인 한숨을 지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나는 그분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음 해인 1934년 10월8일 하오
6시 30분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텍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님과 존ㆍ헤인즈ㆍ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분의 동지들과 동포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우리들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모든것을 참고 이해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노력 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남편은 그간 해외에서 30여년을 독신으로 독립 운동을 하면서 사과 한개로
하루를 견디며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생일날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생일날만은 꼭 미역국과 쌀밥과 잡채와 물김치를 차려서
기쁘게 해 주었다.
젊은 시절의 이승만 대통령
(1875-1965)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카
(190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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