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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의사 장기려 박사

clara40 2024. 1. 19. 12:54
 

- 한국의 슈바이처 -

      장기려 박사 (1911-1995 외과 의사)

바보같은 삶, 그러나 빛이 된 삶.

누군가 여러분에게 ‘바보’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고, 불쾌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는 평생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바보같은 삶이 오히려 성공한 삶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였지만, 집 한 채 없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한 삶을 사셨던

어떤 의학박사 이야기 입니다.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 입니 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

했다가 퇴원 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 하고

있을때 이를 눈치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마리 값을 내주시오.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서울대ㆍ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때, 그에게는 방한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 대학교수 겸 부속 병원

외과 과장으 로 부임할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 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

하고 시작했습니다.

월남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 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 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하는 담뱃 값 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때 까지 20만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

혜택을 해 주었습 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 '바보'...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

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고,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았습 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채 없었지만 사람들

에게 따뜻한 사랑 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때 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 했고, 자신이 칭송 받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

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 가며 부상 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 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 바랜 가족 사진 한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 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 편지는 우리

들의 가슴을 에는 듯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

하였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 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 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 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 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 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나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