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의 화면과 장식성. 클림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먼저 매혹 당한다.
세기 말과 세기 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 부터 해방시킨 화가로 평가된다.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 정신을 대변했던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21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될 무렵이었다.
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1891~1910년 까지의 10여 년 동안 그의 작품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게 된다.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평면적인 면으로 혼재하는 것이다.
1897년 비엔나 분리파가 형성되고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 받는데,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
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 정신의 표출이라는
이런 클림트의 화풍은 외설과 퇴폐적인 요소로 당대의 전통 화단에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그려 나갔고, 비엔나
분리파를 주도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분리파의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 작용을
이룩하는 것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의존
하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리파 화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풍부한 장식성에 있다. 당시 도형 미술을 비롯한
의복ㆍ건축 등 모든 분야를 휩쓸며 유행했던 정사각형은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클림트 역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중요한 화면상의 규칙이
바로 정사각형이었다. 그 속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넣는 일 뿐만 아니라, 정사각형
자체의 이미지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1908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 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클림트의 황금색과 섬세한 구성. 장식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클림트가
교육을 받았던 응용 미술학교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의 유행하던 미술 사조인
또한 그의 작품에서 공간성의 파괴를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범하게 된 오류였다. 장식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고, 작품에서 발산하는 창조적인 힘은 지극히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이다.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 여인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
들을 만난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는 미치 침머만ㆍ에밀
플로게ㆍ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이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
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반자로서
때론 여행의 동지로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
속의 에밀 플로게의 모습은 다소 정숙해 보인다.
클림트는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 불수가 된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소원은 '60세까지는 살고 싶다'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뇌일혈이 아닌 스페인 독감으로 56세에 사망했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 종합병원의 해부 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는데, 클림트의 저주였는지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