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 Laurencin 1
(1883-1956 France)
Marie Laurencin
프랑스의 화가.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와 양식화 속에 자기의
진로를 개척하여, 감각적이며 유연하고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냈다.
흑인 예술이나 페르시아의 세밀화에 영향을 받아,
점차 자유로운 화풍 속에서 여성다운 섬세한 관능을 표현했다.
마리 로랑생은 화가보다 '미라보 다리'라는 시로 유명한
기욤 아폴리네르의 여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The Kiss
어린 소녀들
부채를 든 여인
꽃
마리 로랑생과 아폴리네르
Marie Laurencin & Guillaume Apollinaire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 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불후의 명시 <미라보 다리>에서 노래한 것은
연인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정작 '미라보 다리의 여인' '마리'는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건 바로 잊혀진 여자"라며 사랑을 괴로워 했다.
'세탁선' 이라는 '바토-라부아르'(Bateau-Lavoir)에서 '피카소'를
위시한 전위적 화가 및 시인들과 가난한 공동 생활을 하던 '마리'는
그때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사생아라는 공통점을 지녔던
이 두 사람은 곧장 사랑에 빠졌고, 서로의 예술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정신적 반려가 되었다.
그들이 '바토-라부아르'에 출입하던 5년의 기간은 두 사람 모두의
예술적 재능이 만개한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마리'는 1907년의 첫 전시회 이후로 재능을 인정 받기 시작했고,
우여 곡절 끝에 1914년 결별을 맞이할 무렵에는
두 사람 모두 영광과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각자의 강한 개성 때문에 둘 사이가 좀처럼 풀리지 않게 되자,
'마리'는 돌연 독일 사람인 '오토 폰 바트겐'과 결혼해 버렸다.
그리고 불과 한달여 만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독일로 국적이 바뀐 '마리'는 더 이상 조국에 발 붙일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 전쟁 동안에는 스페인에서 종전 후에는
독일에서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끝에 마침내 귀국을
허락 받은 것은 1920년인 그녀가 37살 때였다.
'아폴리네르'는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났고, 마리는
귀국한 이듬해에 독일에 있는 남편과도 이혼을 했다.
이후 세상을 떠나기 까지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녀는 여러 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겪으면서
변함없이 그림에만 몰두했다.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기욤 아뽈리네르(1880-1918)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위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두 손 맞잡고 서로 마주 보면, 다리 아래 지친 듯 흘러가는 영원의 물결.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물결처럼 흘러 내리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 내린다. 인생은 왜 이토록 더디고, 희망이란 왜 이토록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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