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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마윈의 성공 비결

clara40 2017. 8. 13. 09:17


                                               마윈(Jack Ma)의 성공 비결

                                 


                                                 마윈 (중국 Alibaba Group 회장)


  2014년 9월 18일 미국의 거대 IT 기업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가 이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기업공개(IPO)를 하며 218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해 상장 첫날 시가 총액에서 경쟁자인 아마존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첫 거래가 있었던 다음 날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알리바바의 주가가 공모가 보다

38.07퍼센트 오른 93.89달러로 장을 마감하며, 시가총액 2,300억 달러를 기록해 페이스북을

제치고 구글(4,010억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인터넷 기업이 된 것이다.

  상장을 통해 그야말로 잭팟을 터트린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馬云, Jack Ma)은 “알리

바바의 성공은 중국 경제의 성공이자 중국 인터넷과 중소기업의 성공”이라며, “알리바바

상장은 102년 역사의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마윈은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생각도 숨기지 않았다.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에 앞서 9월 16일 홍콩에서

열린 기업 설명회에서 마윈은 “알리바바는 한 종류의 동물을 키우는 농장 보다는

다양한 동물을 사육하는 동물원이 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사업을 공격적

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천하에 놀아도 싫증나지 않는 게임은 단 하나 있는데, 상거래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그것”이라는 그의 말 처럼 전자 상거래에 미쳐 있는 마윈은, 1964년 중국 항저우(杭州)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쑤저우(蘇州)에서 중국의 민속음악인

핑탄(評彈) 배우로 활동했지만, 1966년 시작된 문화 대혁명으로 핑탄 공연이 금지되면서,

마윈의 집안은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 정도로 곤궁해 졌다. 마윈의 할아버지는 국민당 시절

지방의 치안 유지 간부를 맡았는데, 이 때문에 마윈은 ‘반 혁명 분자’의 손자로 낙인 찍혀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을 준 것은 무협지였다. 의협심에 불타는 주인공이 친구를

위해 기꺼이 칼을 뽑는 이야기에 감동한 마윈은,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숱하게 싸우며

성장했다고 한다.각주5) 마윈은 지금도 열혈 무협 마니아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무협

작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진융(金庸)이다. 그는 언젠가 “무협 소설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탐미

한 것이 나에게 사유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말했다. 알리바바 본사 회의실의 이름을 진융의

소설에 나오는 마천애(摩天崖)ㆍ광명정(光名頂)ㆍ달마원(達磨院)백화곡(百花谷) 등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윈의 집무실은 도화도(桃花島)다. 마윈은 진융의 무협 소설 『소오

강호(笑傲江湖)』에 등장하는 펑칭양(風淸揚)을 자신의 별호로 삼을 만큼 사랑하는데, 고객

제일 · 단체 합작 · 변화 포용 · 성신(誠信) · 격정 · 경업(敬業) 등으로 이루어진 알리바바의

9대 가치관에는 펑칭양이 사용하는 무술인 ‘독고구검(獨孤九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리

바바의 직원들도 무협 소설의 등장 인물에서 따온 예명을 사용해야 한다. 무협지의 등장

인물 처럼 의협심을 가지라는 마윈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마윈은 태극권 솜씨도 수준급

으로 알려져 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의리 때문에 싸우느라, 학교 공부는 신통치 않았다. 마윈은

학교 성적이 바닥을 기어서 선생님들이 걱정하는 열등생이었지만, 한 가지 잘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영어였다. 영어를 잘하는 이유가 재미있다. 대단히 엄격했던 마윈의 아버지는 툭하면

마윈을 꾸짖었다고 한다. 당하고는 못 참는 성격이었던 마윈도 말대꾸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

에게 대놓고 말대꾸를 하긴 좀 뭐해서 영어로 실컷 하고 싶은 말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영어

실력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컴퓨터 문외한이 인터넷 기업을 창업하다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성장했지만, 사실 그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마윈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서른 번도 넘게 거절 당해 봤습니다.

입대도 거부당했고, 경찰 모집에 떨어진데다, KFC와 호텔 입사 시험에 모두 실패했죠.

이렇게 수없이 거절을 당하고 좌절을 겪으면서, 오히려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각주9)

대학 입시에서도 두 번이나 떨어졌다. 3수를 할 때도 간신히 전문 대학에 들어갈 수준의

실력이었는데, 운 좋게도 항저우 사범대학 영문과의 정원이 미달되어 들어갔다. 일찍

부터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마윈은 공부 보다는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항저우 전역의 대학연맹 회장을 할 정도로 탁월한 웅변 능력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30세의 나이에 항저우 10대 우수 청년 교사에 선정되는 등 잘나가는 영어 강사 생활을

했지만, 1995년 미국 시애틀에서 처음 인터넷을 접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마윈은 처음 인터넷을 접하고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너무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온라인 세상 어디에서도 중국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현실에 마윈은 너무나 속이 상했다. 어쨌든 마윈은 인터넷을 접한

순간 인터넷이 인류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바꾸어놓을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구체적으로 인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인터넷을 통해 사업을 하자는 생각을 굳혔다. 훗날 마윈은 당시 자신은 ‘눈 먼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맹인’ 같았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할 만했다. 인터넷과 컴퓨터에

사실상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컴퓨터 활용 능력은 겨우 이메일이나 주고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윈은 1999년 3월 자신과 직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50만 위안의 자금으로

알리바바를 창업했다.각주12) 베이징(北京)이나 선전(深圳) 등 IT 중심지가 아닌 항저우

에서 창업한 것도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창업에 앞서 마윈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17명의 창업 멤버를 모아 놓고, “우리들에게는 3가지 목표가 있다”며 이렇게

선언했다. “102년 동안 지속될 기업을 만든다”, “중국 중소 기업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

한다”, “세계 최대 전자 상거래 기업이 된다.”

  그런데 마윈은 왜 하필 중소 기업을 위한 기업 간 전자 상거래(B2B) 사업을 하기로 한 것

일까? 주변에서는 그가 B2B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개인 간 전자 상거래(B2C)에 비해 수익

기반이 취약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마윈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마윈은 1997년

베이징에서 중국 대외 경제무역부의 공식 사이트 개설과 정부와 산하 무역업체 간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때 제조 업체와 무역 업체들 간의 전자 상거래가 필요

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또 인터넷에서 기업 간 거래량이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보다 훨씬

많다는 것도 이유였다.

  이와 관련해 류스잉 · 펑정은 『알리바바, 세계를 훔치다』(2014)에서 “새우를 잡아서

부자가 된 사람은 들어봤어도 고래를 잡아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경제의 세계에서 대기업은 고래다. 고래는 새우를 잡아먹고 생존하며, 새우는

고래가 먹다 남은 찌꺼기로 연명하는 상호 의존 관계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는 개성적이고

독립된 세계다. 소기업은 인터넷에서 독립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으며, 다양한 제품을 선보

일 수 있다. 인터넷의 진정한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