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하영선 인터뷰 기사>
- 배명복의 Interview '사람 속으로' -
* 요즘의 외교 문제를 다룬 동생 하영선의 기사를 올린다.
하영선 교수
미국과 중국이 전방위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세계의 지각판이 흔들리고 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 하고 있는 한국에는 재앙이다. 천하 대세를 읽는
안목과 지혜가 그 어느 때보 다 절실한 상황이다.
50년 가까이 세계 정세와 국제 정치의 흐름에 천착해온 하 영선(72) 동아시아연구원
(EAI)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을 지난 18일 EAI 회의실에서 만났다.
- 미·중 관계를 ‘협력적 경쟁’ 관계로 규 정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협력이란 말 자체가
끼어들 여지가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다. 어느 쪽 책임이 크다고 보나.
“어느 일방의 책임으로 몰기 어렵다. 중국은 트럼프가 지나치게 미국 우선 주의로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미국은 기대와 달리 시진핑이 국제 질서의 기본 원칙이나
가치를 공유하기 보다 딴 살림 을 차리는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느 쪽
주장이 100% 맞다, 틀렸다 고 하기 힘들다. 지금 상황은 ‘대결적 경쟁’ 관계로 보는것이
맞을것 같다.”
부당한 보복엔 WTO 통해 당당히 맞서야 - 미ㆍ중 무역 전쟁은 본질적으로 패권 경쟁
이기 때문에 적어도 한 세대에 걸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있다. “그것도
굉장히 짧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대가 아니라 세기의 문제 로 봐야 한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 으로도 미ㆍ중 관계를 바라보는 안목의 시간이나 공간 개념이 너무
짧고 협소 한 느낌이다.
국내외 논의가 주로 의지 하는 이론이 ‘세력 전이(power shift)’ 이론이다. 기득권
세력과 새로 부상하 는 세력은 갈등 관계에 빠질 수 밖에 없 다는 이론인데, 그다지
설득력 있는 이론은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 세련된 글로벌 리더십 이론 중 하나가
‘장주기(長 週期)’ 이론이다. 이 이론은 국제 정치의 세력 교체 주기를 100년 정도로
본다. 100년이라는 한 세기는 25~30년 단위로 끊어 네 단계(phase)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세계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집권 세력이 등장하는 첫 단계가 지나면 도전 세력이
나타나는 두 번째 단계가 오고, 이어 도전 세력이 집권 세력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
하는 ‘디레지티메이션 (delegitimation)’ 단계가 온다. 세계 공공재 보다 자신의 이익을
너무 챙기는 것 아니냐고 따지기 시작하는 단계다.”
- 지금이 바로 그때란 뜻인가.
“그렇다. 하지만 도전 세력의 파워가 지배 세력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있을 정 도의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이 시기에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미중ㆍ경쟁은 크게 네개 전선에 걸 쳐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무역 전쟁 등 경제 파트,
두 번째는 기술 파트, 세 번째는 에너지 파트, 네번째는 군사 파트다. 경제는 이미 미ㆍ
중이 국내 총 생산(GDP) 기준으로 19 : 14의 게임이 됐기 때문에 어느 일방이 100%
승리할 수 없다. 따라서 적절한 선에서 주고 받는 타협이 불가피할 것이다.
군사 파트는 국방비 기준 으로 7 : 2의 싸움이다. 지금 중국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정면
대결하는 것은 자살골이나 다름 없다는걸 중국은 잘 알고 있다. 중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
있다고 주장하는 동중국해나 남중국해, 대만이나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상황이 조성
될순 있지만, 미국과의 정면 대결 은 피할 것이다.
남는 것은 에너지와 기술 파트다. 셰일 가스 덕에 미국은 에너지 수출국이 됐다. 에너지
수입국인 중국이 의지할 곳은 중동과 러시아다. 하지만 러시아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데다, 중동에선 미국이 이란 카드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렇다고 에너지를 미국에 의존
할 순 없기 때문에 중국 은 상당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중국의 정보 기술(IT) 기업인
화웨이에서 보듯이 무역 전쟁은 기술 패권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개발된 기술의
상용화에서는 중국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따라 잡았지만,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
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앞서 있다.
이 네 가지 모두 우리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다. 각각의 전선에서 전개되는 미중ㆍ대결
양상을 철저하고 치밀하게 모니터링 해야 하지만, 정부나 학계 모두 구멍가게 수준이다.”
- 트럼프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만, 시진핑에겐 임기가 없다. 시간은 중국 편 아닌가.
“어려운 질문이다. 21세기가 여전히 미국의 세기로 남을 것이냐, 결국 중국의 세기가
될것이냐는 문제다.”
- 중국의 세기가 될 가능성은 있나.
“21세기 중반까지는 여전히 미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이후가 어 떻게 될지는
중국에 달려 있다. 관건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정치 시스템. 21세기 를 이끌어갈 정치
시스템으로 지금의 중국 시스템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2등 까지 가는 데는 중국
공산당 체제가 상당히 효율적이었지만, 1등이 되려면 그것으론 부족하다. 상상력과
창발성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데, 과연 지금의 정치 시스템으로 그게 가능할까.
두 번째는 문명 표준이다. 지구인들이 새로운 문명 표준으로 미국보다 중국 모델이
낫다는 판단을 향후 20~30년 내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시진핑이 제시한 2050년
사회주의 문명대국 건설 정도의 비전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 미중ㆍ갈등이 격화하면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빠진 나라가 한국이다. 이 상황에 대처
하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를 점수로 평 가해 달라.
“부적절한 질문이다. 문제를 풀지도 않았는데 채점을 할 순 없는 일이다. 여 야를 떠나
정치권과 학계ㆍ언론 모두가 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의 위기감을 제 대로 느끼고 있는지
의문이다. 미중ㆍ관계는 반 세기나 한 세기에 걸쳐 우리 삶의 지평 전체를 뒤 흔들 수 있는
중차대 한 문제다. 그에 비한다면 남북 문제는 아주 작은 문제다. 눈 앞의 작은 문제를 놓고 싸우느라 큰 그림을 못 보고 있다.”
- 지금의 청와대 외교 안보팀과 정부의 외교ㆍ안보 진용으로는 미ㆍ중 관계의 험난한
파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누구로 바꿔도 쉽지 않은 문제다. 설사 바꾼다 해도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남북 문제나 국제 문제를 보는 국내 보수 나 진보의 시공간
개념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미ㆍ중 관계는 50년ㆍ100년 을 내다 봐야 하는 문제다.
80년 대의 국 내적 시공간 개념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로 팀을 짜야 한다. 적폐 청산 보다
중요한게 세대 청산이다.”
- 문재인 정부는 남북 공조에 치중한 나머지 미ㆍ중이 격돌하는 천하 대세의 큰 흐름을
놓쳐 국가적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 근ㆍ현대사의 비극에서 잉태된 남북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숙제다.
그러나 긴급성이나 중대성의 우선 순위로 보면 미ㆍ중 문제가 당연히 먼저다. 남북 문제도
미ㆍ중 관계 속에서 풀수 밖에 없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 路)’, 미국은 인도ㆍ태평양
전략을 중심 으로 새 판을 짜고 있다. 그 사이에 낀 남 북이 아무리 힘을 합쳐도 천하대세를 움직일 순 없다. ‘우리 민족끼리’ 프레임으로 접근하면, 자칫 양쪽 모두로 부터 외면 당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갇히 는 신세가 될 수 있다.”
- 화웨이 문제를 놓고 한국은 미ㆍ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고 있다. 화웨이가 제2 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가 되지 않게 하려면,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화웨이는 기본적으로 사드와 같은 문제다. 국가 이익을 따져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누가 보더라도 명분이나 원칙, 규범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의
협력도 중요하다. 기업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할 문제가 아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얘긴가.
“사드 때처럼 어정쩡하게 대응해선 안 된다. 미국과 중국, 양쪽 얘기를 다 들어 보고,
한쪽의 얘기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쪽을 선택해야 할 것이 다. 그로 인해 다른 한쪽
으로 부터 보복을 당하더라도 이런 원칙에 따라 우리는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정부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 정부와 학계 모두 구멍가게 수준 대처 - 그로 인해 기업들이 피해를 볼 수 있지 않 은가. “미ㆍ중이 싸우는 상황에서 우리 쪽에 전혀 불똥이 튀지 않을 순 없다. 일정 부분 감수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다만 사드 때 처럼 당하기만 할 게 아니라, 세계 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등 원칙에 따라 당당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한ㆍ미 동맹에 입각해 확실하게 미국 편에 서는 것이 장기적
으로 국익에 낫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편을 들 것이냐, 중국 편을 들 것이냐는 수준의 담론은 20년 전 얘기다. 지금의
중국은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일본은 확실하게 미국에 붙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중국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일본 보다 큰 한국이 일본처럼 할 수는 없다. 한국이 미ㆍ중국
사이에서 정말로 고민하고, 고생하고 있다는 인 식을 양쪽에 심어줘야 한다.”
- 그러다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을 가능 성은 없나.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렇다고 섣불리 한쪽 편을 들기엔 우리에게 미ㆍ중 갈등은 너무나
큰 문제다. 단순히 사드와 화웨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향후 100년을 좌우할 문제다.
미ㆍ중 갈등 속에서 살아 남는 것은 고도의 지혜와 현명함을 요구하는 문제다.”
하영선 이사장
1947년 서울 출생.
1975년 서울대 외교학 석사.
1979년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1980년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1993년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장.
1996년 서울대 미국학 연구소장.
2010년~ EAI 이사장.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ㆍ칼럼니스트 bae.myungb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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