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여사
결혼후 나는 맨 처음 남편의 짐을 챙기면서 "어쩌면 남자가 이렇게 꼼꼼하고
알뜰한 면이 있을까?" 하고 속으로 놀랐다. 밤낮 바쁘게 돌아다니며 한평생
독립 투쟁을 해온 외통이 나그네의 짐이라 초라하긴 했지만, 너무도 깔끔하고
단정했다. 결혼후에도 "내 짐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테니 염려말라"고 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귀찮게 생각할 정도로 남편은 혼자 사는데 익슥해 있었다.
연애 시절 남편은 나에게 "과부 주머니에는 은이 서말이고, 홀아비 주머니
속에는 이가 서말"이라는 한국 속담을 가르쳐 주면서 자기 주머니 속에 담고
다니던 작은 참빗을 꺼내어 보여 주며 "이것이 내 전 재산이오."하고 진지하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당시 내 빈 주머니를 보여 주면 현명한 여자는 달아날 줄 알았는데, 내 뜻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쁜 '혹' 하나가 생겨서 이토록 내가 힘들게 살고 있다"고
남편은 나에게 농담을 하곤 했다. "이것이 내 전 재산이오"하며 남편이 소중하게
웃 저고리 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며,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날때 까지 간직했던 그
참빗은 어머님이 남겨 주신 물건이었다. 이 참빗은 어찌나 빗살이 작고 촘촘한지
"어렸을 적에 어머님이 머리를 빗겨주시면 아파서 울기도 했다"고 남편은 어린
시절의 애틋한 추억을 나에게 얘기 해준 적이 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 남편이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할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자녀를 모아 우리 말을 가르치고 민족의
얼을 심어주며, 이 빗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이와 서캐를 잡아주기도 했다.
6.25동란을 치를때는 부산 임시 관저의 주변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전쟁 고아
들의 머리에서 이와 서캐를 남편은 그 참빗으로 흝어준 적도 있다.
하와이 병실에서 그토록 고국을 그리워 하던 남편은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
빗을 만지며 향수를 달랬다.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남편이
외롭게 별세한 후 줄곧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는 그 참빗을 며느리에게 맡겨
두었다. 나는 이 참빗을 보면 남편과 함께 지내온 세월의 한맺힌 마디마디가
떠올라서 눈물로 목이 멘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 말을 못한다고 건국 대통령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러쿵 저러쿵 그럴듯한 거짓말을 쓰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글쓰는
사람이 양식이 있다면 역사의 현장에서 똑똑히 지켜본 증인들에게 진실과
사실을 확인한 후에 책임있는 글을 쓸 것을 권유하고 싶다.
지난번 나는 모 텔레비전이 방영한 1950년부터 1951년까지의 6.25동란
기록 필름을 지켜보았다. 나는 남다를 감회를 느끼며 처음 부터 끝까지 보았다.
그런데 기록 필름을 상영할때는 그당시 있었던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할텐데,
멋대로 편집하고 해설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기록영화가 보여 주는 것보다 그당시 전쟁의 참화는 훨씬 더 비참했고, 국민
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유엔군과 우방의 원조는 받았지만, 한국
인들의 줏대와 배짱은 꿋꿋했고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국민들의 도의심은 살아
있었고, 여성들의 정조 관념도 대단해서 어느 유엔군 병사가 껴안았던 서울의
한 처녀는 그 수치심을 못이겨 한강에 투신 자살까지 했었다.
6.25때 나는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매일매일 겪었던 일들을 타이프해 놓았다.
날마다 손끝이 브르트도록 타이프해 보낸 편지와 일기를 보면 지난 일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수많은 탱크를 앞 세우고 불법 남침했던 공산군을 맨손으로 막아야 했던 긴박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을 전화로 불러내어 호통치던 대통령을 만류하던 일, 27일
새벽 남하하는 기차 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내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 했다"고
고뇌하며 괴로와 하던 대통령의 모습, 단돈 5만원을 가지고 떠났던 피난길,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용변을 봐야 했던 시골변소, 이리역 구내에서 나눠
먹던 건빵, 대통령이 권하는 건빵을 받아들고 눈물을 억제하던 일....
목포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는데 파도와 풍랑이 심하여 모두 배 멀리로 쓰러
졌지만, 75세의 남편은 혼자서 계속 꿋꿋하게 버티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초
죽음이 된 나는 물론 수행원들 까지 신음하며 노란물을 토하고 쓰러지자, 백발의
대통령이 일일이 돌보아 주었다.
"아랫 배에 힘을 주면서 인자하셨던 어머님을 생각해 봐. 그러면 속이 좀 가라앉을
걸세"하며 젊은 수행원들을 격려하던 남편의 다정한 음성이 아직도 내 귀에는 들려
오는 것 같다. 남편은 배 안에서 일행들을 돌보느라 눈한번 안 붙였다. 함정에서는
군인 식사와 똑같이 했다. 꽁보리밥에 짠지와 날 된장이 전부였다.
일행 모두가 음식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오직 대통령 혼자서 밥을 한알도 남기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밥 그릇을 깨끗이 비울수 있는 남편
이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반찬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다. 병영을 돌아다니면서 일선
장병이나 유엔군 장병들과 식사를 할때, "노인이 웬 식욕이 저토록 좋은가" 하고
놀라는 외국 장군들의 감탄사를 엿들을 때 아내로서 약간 창피할 따름이었다.
대구에서 나는 심한 설사로 큰 고생을 했다. 물을 갈아 먹은 탓인지 3일 동안 꼼짝
없이 누워있는 상태가 됐다. 피난중 심한 긴장과 더위 때문에 탈진 상태에다 대구
지사 관저 뒷 마당에 있는 펌프 물을 마신 때문에 배탈을 얻은 것이다.
남편은 옆에서 두손을 모으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의 몸은 40도가 넘는 열로 종종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경북 지사였던 조재천씨 부인이 정성스레 콩나물국을 끓여왔다. 파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장국이었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은 한결 부드러웠다. 나는 이 국물을
두어 모금 마신후 두었다가 남편에게도 권했다. 남편은 이 국물을 받자 "마미, 당신
이나 마실 일이지...." 하면서도 단숨에 국 그릇을 비웠다. 콩나물국을 받아마시는
남편을 보고 있던 나는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대구 피난 시절 임시 관저에는 우리 부부를 비롯해 각료, 비서관, 경호 경찰, 국회
의원 등 70여명이 북적거렸다. 이들의 뒤치닥거리를 조지사 부인이 가정부 2명을
데리고 맡아서 해주었다. 당시 남편은 양복 보다 모시 옷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렇
지만 나는 모시 옷을 어떻게 매만지는가를 몰랐다.빨래에서 부터 풀을 먹여 다림질
까지의 모든 일이 나에게는 너무나 서툴렀다. 이때 조지사 부인은 이런 일들을 모두
도맡아 해냈다. 참으로 고마왔다.
70여명이 넘는 임시 관저의 사람들 식사며 잔 심부름 까지 해냈던 지사 부인은
과로로 유산까지 했으며, 손발이 퉁퉁붓고 거동조차 어려웠으나 꾹 참고 일을 해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됨을 가장 가슴 아하하던 남편은 어느날 나에게 달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면 그만큼 조지사 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일감을 줄여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다음날 아침 식사 부터 사과와 토마토 그리고 날 달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또 매끼 반찬도 세 가지만 하도록 했고, 모시 옷도 빨아서 그냥 입었다.
이런 남편의 부탁은 자신이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지사 부인의 일손을 덜게 해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남편의 이런 뜻을 잘 알아 차리지 못한채 그전 처럼 식생활을 했고, 신 국방 장관은
아침 5시반만 되면 나타나 날 달걀이 아닌 반숙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요즈음도 서울에 살고 있는 조지사 미망인 강재례 여사가 종종 나를 방문하면, 피난
시절 고생했던 얘기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몇해전 KBS에서 이산 가족찾기 방송을 할적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눈믈을 흘렸는지 모른다. 서로 얼싸 안고 울고 웃는 이산
가족들을 따라 함께 울면서 나는 돌아가실때 까지 나를 걱정하며 보고 싶어하신 친정
어머님을 생각했다.
나는 이 박사와 결혼한후 늘 마음 속으로 생각은 있었지만, 끝내 어머님을 생전에
찾아 뵙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TV를 보면서 마음 속으로 "어머님, 이 불효 막심한
딸을 용서해 주세요"하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어머님은 내가 노후에도 한국에
와서 이토록 행복하게 살고있는 모습을 보신다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리라 믿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나의 친정이 어느 나라인가를 물어오는 시민들의 전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호주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친정은 호주가 아니고, 유럽에
있는 음악의 도시 빈(Wien)이 있는 오스트리아이다.나의 친정 집은 아름다운 숲이
있는 빈의 교외에 있었다.
젊은 시절의 프렌체스카
'사진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6 - 모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인물 (0) | 2022.02.08 |
---|---|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5 - 경무대의 단골 메뉴 (0) | 2022.02.07 |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3 - 가난한 독립 운동가 (0) | 2022.02.05 |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2 - 신혼시절 (0) | 2022.02.04 |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1 - 첫 만남 (0) | 2022.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