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미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 운동하던 시절, 우리는 독립 지도자의
체면에 알맞는 호텔에 유숙했지만, 식비는 아껴야 했다. 영양가 높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바나나가 미국에서는 값이 쌌기때문에 우리는 주로 바나나와
날 달걀로 끼니를 때웠다. 날 달걀을 먹을 때는 껍질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종이에 싸서 버렸다. 날 달걀을 먹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서양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6.25 동란때는 일선 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에 갔다가, 끼니를
놓쳐서 종종 굶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호주머니 속에 잣을
넣어드려 시장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6.25 동란이 났던 1950년의 추석날
에는 청도 피난민 수용소와 경산 전재민들을 방문했는데, 명절 날이니 점심
준비는 안해도 될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점심준비 없이 떠났다가
우리는 물론 수행원들 까지 점심을 굶겼었다.
마침 대통령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잣 때문에 우리는 겨우 시장기만
면했다. 저녁이 다 될무렵 부산 임시 관저로 돌아왔을때, 양성봉 지사 부인이
차려 놓은 추석 음식을 우리는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잣은 그해
여름 우리가 경북 지사 관저에 있을 때, 서울 시장 이기붕씨 내외가 대통령
에게 드리라고 한 봉지를 구해서 가져왔었다.
대통령은 선물을 받으면 꼭 답례하는 습관이 있었다. 잣을 가져온 이기붕
씨네 어린 두아들 강석과 강욱에게 갖다 주도록 참외를 사기 위해 대통령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대구 거리로 이기붕씨와 함께 나갔다. 참외는 1천원에
7개였다. 대통령은 1천원어치 참외를 산후 참외 장수에게 '덤으로 하나만
더 주시오'하며 덤 한개를 집으려하자, 참외 장수는 '할아버지,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하며 대통령의 손에서 참외를 뺏더라는 것
이다. 피난살이 하는 이기붕씨의 행색도 말이 아니었지만 풀 안먹인 후줄근한
모시 남방 차림의 노인이었으니, 경호원도 없이 나간 대통령과 서울시장 일행을
참외 장수가 알아 볼리가 없었던 것이다. 겁도 없이 걸어서 대구 거리로 나간
대통령과 이기붕씨가 염려되어 우리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보자 대통령은 '마미, 참외 덤 한개
얻으려다 순사한테 붙잡혀 갈뻔했어'하고 웃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대통령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파장이 된 저자 거리에서 시골 참외 장수에게
덤 한개 얻으려다 뺏기고 온 대통령이었지만, 바로 그 대통령을 중공의 모택동
주석이 가장 무서워했다고 한다. 중공의 모택동 측근에서 고위 관리를 지내다가
홍콩으로 탈출해 나왔던 주경문이라는 중국 사람이 쓴 책에서 '모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동양의 인물은 한국의 리승만 대통령'이라고 쓴것을 나는 읽었다.
우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던 미국 상원의 프레드릭 브라운 해리스 목사는
'내가 아는 리승만 대통령은 가장 선량하고 성실한 한국 신사'라고 평했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백발의 대통령을 무서운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무로 대통령과 면담을 해야했던 미국의 지휘관들과 대통령 특사나 각국의
대사들은 나를 대통령의 마음을 측정하는 측후소로 여길 정도로 대통령의
심기를 살폈다고 한다. 즉 관상대에서 날씨를 예보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대통령 곁에 나타나는 날은 청명한 날씨로서 면담 분위기나 결과도
좋다는 것이고, 얼씬도 안하는 날은 찬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뒤덮이며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라고 새로 부임해 오는 인사나 외국 특사에게 서로 귀띔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런줄은 짐작도 못했지만, 회고해 보면 많은 외국 귀빈들이
내가 접견실의 대통령 곁에 나타나면 무척 반가와 했던 것같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밀려 후퇴하던 워커 장군이 의정부
근방에서 교통 사고로 순직한 뒤 후임으로 온 리지웨이 장군이 대통령에게
첫 인사를 왔을 때였다.
중공군을 맞아 싸우기 보다는 후퇴만 하고 있던 유엔군의 전술을 대통령은
의심하고 있던 때였다. 전략이라고 해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곤란과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라고 대통령은 역정을 내며 불만이 컸었다. 작전상
후퇴라고는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 지면, 외국 군대가 국군처럼 최후의 일인
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더우기 연합사령부의 참모들은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킬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리지웨이 장군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부임해
오는지 우리는 걱정이 되었다. 사진으로 본 리지웨이 장군의 인상이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지만, 대통령은 그사람이나 이사람이나 마찬가지 일것이라고
별로 탐탐치 않게 여겼었다. 무초 대사와 함께 리지웨이장군이 대통령을 뵈러
왔을 때 대통령은 표정없이 담담한 태도로 장군을 맞이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좀 긴장한 기색을 보였는데,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나서
'대통령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입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고야 말겠습니다'하고 군인답게 말했다. 장군의
이 결의에 찬 말을 들은 대통령은 힘차게 장군의 손을 잡고 나를 불러 소개했다.
그리고 제일 맛있는 차를 끓여 오라고 나에게 말했다.
대통령이 자기의 말에 만족해 하는 것을 보고 리지웨이 장군은 시종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 리지웨이장군의 기뻐하던 모습과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전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8군을 재 정비하여 공세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던 리지웨이 장군은 그후 곧바로 중공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대통령은 아들처럼 사랑하며 신뢰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8군의 책임자로 왔던 밴플리트장군, 렘니쩌장군, 테일러
장군 및 언커크의 책임자로 왔던 콜터 장군 등 유엔군 장성들과 미국 대사들은
대부분 대통령을 친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대통령이 돌아 가신지 23년이
되는 지금에도 이중 생존하고 있는 미국의 장군들과 친지들은 거의 모두 나의
생일까지 기억해 주고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를 적은 카드 속에다 그당시의
추억들을 적어 보내어 나를 위로해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로 와서 대통령이 반대했던 휴전 회담 때문에
가장 많은 시달림을 받고,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날 벼락을 맞았던 마크 클라크
대장이 지난번 한국 전쟁을 회고하는 TV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의 애국자
리승만 대통령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 지도자로 존경하고 있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유엔군에 고추 가루를 얼굴에
뿌려 쩔쩔매게 만들었던 한국의 기발한 고춧가루 작전이 성공시킨 반공 포로 석방
소식에 입에 물고있던 담배 파이프를 떨어뜨렸던 클라크대장이 이렇게 회고한 것
이다.
또한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한국의 리승만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월남에도 있었
다면, 월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하는 것도 읽어, 나는
한국의 노 대통령에게 그토록 혼이나고 시달림을 받았던 미국의 장군들이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게 증언을 할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고마웠고, 그 훌륭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6.25 동란 당시 대통령에게 가장 호된 시련을 받았던 노총각 대사 무초씨가 몇년
전에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이화장으로 나를 방문해 주어 얼마나 반가웠
는지 모른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 '언제 갈지 모르는 힘없는 노인'이라고 대통령을
비난했다가 무초 대사는 혼이 난적이 있었다.
대통령은 무 초대사와 밴플리트 장군과 콜터 장군을 진해 별장으로 초대하여
낚시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때 바다 낚시를 즐기자고 하여 대통령은 조그만
목선을 준비하였다. P.T정을 타고나간 일행이 낚시를 위해 목선에 갈아타자 파도와
풍랑이 거세어져 배가 몹시 흔들렸는데도 대통령은 멀리까지 나갔다.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무초 대사는 배 멀미를 시작했다. 그래도 대통령은 더 멀리 나갔는데 대사는
어찌나 배 멀미를 힘하게 했던지 토하다 못해 바지까지 흠뻑 적시고 말았다. 대통령은
그제서야 반 죽음이된 대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당신은 나이 많은 나보다도
약하구려!'하고 웃으면서 배를 저어 돌아온 일이 있었다.
독립 운동 당시 경비를 절약하려고 선임이 제일 쌌던 작은배 엔터프라이즈호를
하와이에서 타고 승객 16명과 함께 열흘간이나 거센 풍랑을 견딘 끝에 샌프랜시스코에
도달한 일이 있고, 그 후에도 여러번 이 고생스러운 선편을 이용해야만 했던 대통령은
거센 풍랑이 일때 작은 배에서 받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무초 대사는 그 때 부터
고분고분해 졌다.
한국에 미군 정책 책임자로 와서 자기 생애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나날을 보냈다고
회고했던 하지 중장은 '억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리승만 박사 같은 한국 지도자를 상대
해야 했던 군정은 다시 생각하기 조차 끔찍하다'고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말한것을
앍은적이 있는데,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익에 저해되는 미국의 한국 정책 때문에 하지
중장을 몰아 세우고 쫓아내는데 앞장 섰을뿐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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