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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7 - 현미떡국과 건강차

clara40 2022. 2. 9. 11:39

         아들 이인수, 며느리 조헤자,

     두 손자와 함께 이화장에서 (1981)

  74세때 대통령직을 맡았던 남편이었지만, 대통령 주치의는 따로 없었다.
대통령은 여든두살때 그 높은 북한산 꼭대기 까지 걸어 올라가서 문수사를

찾아가 '문수사'라는 휘호를 쓸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에 남편이 병원과

의사의 신세를 졌던 일은 별로 기억이 안난다. 다만 남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이화장에서 우리는 이기붕씨의 소개로 당시 이화대학 부속병원

의사였던 손창환박사를 알게 되었다.
  손박사는 이기붕씨의 위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주었던 훌륭한 의사였다.

대통령 보다는 오히려 내가 손박사의 진료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1953년

11월 27일 장개석 총통의 초청으로 자유 중국을 방문했을 때와 1954년 7월

2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했을때 80세의 대통령은

주치의 없이 공식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 왔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혜로운 일은 아니었던 것같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 대통령은 병환이 나도 약을 사먹지 않고 견디며 자연

치유 될때 까지 있었다. 수중에 약살 돈이 없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통령은

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감기가 들면 맹물만 끓인 백비탕과 콩나물국이나

북어국을 들었고, 의사의 지시나 약 보다 재래식 요법으로 병을 이겨냈다.
  심지어 미국에서 독립 운동하던 시절 목 뒤에 큰 종기가 생겼을 때도 미국

의사가 수술을 권하자, 우리나라 고약이면 수술않고도 나을 수 있고 고름만

짜내면 된다고 남편은 버텼다. 미국에는 고약도 없었지만 '수술을 안 하시면

곤란하다'고 의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한참 후에 '만일 내가 당신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소?' 하고 물었다. 의사가 '지금 당장 수술을 해드리

지요' 하고 대답하자, '그럼 좋아. 수술하도록 하시오'하고 마취 주사를 거절

한채 꼼짝않고 참아냈는데, 담당 의사는 '그토록 잘 참는 분도 못 봤지만,

자기가 수술하면서 그토록 땀을 흘려 본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1.4후퇴때 이후 땔감이 부족해서 혹독한 추위로 누구나 고생이 극심할때

부산 임시 관저도 몹시 추워서 내 손이 동상으로 여기저기 부어 올라 중요한

기밀 서신들을 타이프해야 했던 나는 무척 괴로웠었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보기는 내 평생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통령은 마늘 껍질과 마늘대를

삶을 물을 미지근하게 해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나는 그런 치료 방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뜻에 따랐다.
  그 당시 우리 부산 임시 관저를 드나들면서 나에게 '도와드릴 일이 없는지?'를

묻는 무초 대사나 미국의 장군에게 부탁하면 동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연고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인 신세를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마늘대와 껍질을 삶은 물에 손발을 담그는

민간 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했었다.
  회고하기 조차 끔찍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1.후퇴를 했던 1951년 설날은

경황 중에도 서울 경무대에서 안남미로 떡국을 끓여 먹던 기억이 난다. 내가

써놓은 6.25 일기를 들여다 보니 대통령은 고깃 국물이 아닌 북어 국물로 끓인

떡국을 동치미와 함께 두 그릇이나 들었다고 씌어 있었다. 대통령은 고기로 만든

음식 보다 북어를 재료로한 음식을 더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어국, 북어찜,

북어 무침은 우리집의 단골 메뉴일 뿐만아니라, 북어 머리나 껍질도 버리는 일이

없었다.
  경무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양 노인이 북어 머리를 열심히 모으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칭찬하는 것을 보고, 나는 북어 껍질 까지도 함께 모았었다.

맨 처음 나는 마음 속으로 이 북어 머리와 껍질은 끓여서 새밥에 섞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6.25 동란이 일어나기 전 이른 봄 어느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양학준

노인이 경무대 주방에서 국 끓이는 냄새가 나자 대통령이 잠옷 바람으로 나가

한참 동안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주방에서 대통령과 양 노인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통령이

새벽의 찬 기운에 감기라도 들까봐 잠옷 위에 걸치는 가운을 들고 주방으로 내렸

갔었다. 그 곳에서는 북어 머리를 듬뿍 집어넣고 파와 고추를 썰어넣어 끓인 남비를

가운데 놓고 대통령과 양 노인이 대접 가득히 담은 국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사는 양 노인은 술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아침 일찍 와서 자기가 먹으려고 끓여 놓은 해장국을 대통령에게 나누어 드린 것이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생선은 머리 부분이 제일 맛있고, 소는 꼬리 부분이 맛이 좋다고 일러

준 적이 있었다. 그토록 대통령이 즐겨하는 북어탕에는 비타민 D와 칼슘이 풍부하여

몸에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후 나는 양 노인이 넣은 재료 외에도 당근과 양배추와 고기를 더 넣어서 영양가가

훨씬 높은 국물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권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양 노인이 자기 먹으

려고 끓인 해장국을 더 좋아했다. 역시 한국 음식 맛을 내는데는 내가 양 노인을 능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떡국 솜씨만은 언제나 내가 제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특히 내가 만들어 낸 특제 현미 떡국은 대통령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지금도

우리 이화장에서는 현미 떡국을 끓여 먹고 있는데, 특히 아들과 큰 손자 병구가 할아버지

이상으로 현미 떡국을 좋아해서 나는 무척 기쁘고 행복하다.
  현미는 쌀눈에 모든 공해와 독을 제거해 주는 휘친산이 들어있어 으뜸가는 건강 곡식

이다. 현미로 지은 밥과 떡이 몸에 이롭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현미밥은

백미로 지은 밥 보다는 덜 부드럽기 때문에 현미와 백미를 섞어서 밥을 지으면, 한결

먹기가 좋고 현미로 백설기를 하면 밥보다 더 먹기가 좋았다.
  특히 한국의 율무는 항암제이며, 들깨는 만병 예방식인데, 날로 씹어먹는 것이 특히

몸에 좋다고 한다. 나는 커피같은 자극성있는 차 보다는 우리나라 재료로 대통령을 위해

여러가지 건강차를 만들어 드렸다. 여름에는 시원한 오미자차를 만들어 드렸고, 겨울에는

따끈한 모과차와 유자차를 끓여 드렸다. 모과차와 유자차는 맛과 향기가 좋아서 외국

귀빈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특히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나에게 모과차 만드는

법을 물어 보기도 했다. 요리를 부인 보다 더 잘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불고기 양념

하는 법을 나에게 물어서 가르쳐 드린 일이 있었다.
  특히 머리를 많이 쓰는 남편을 위해 나는 밀눈을 살짝 볶아서 밀눈차를 만들어 드렸다.

밀눈차는 고 단백차로서 으뜸가는 영양차이다. 율무를 볶아서 율무차를 만들거나, 결명자를

콩과 함께 볶아서 끓이면 참으로 구수하고 맛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는 온상 재배 보다 값도 싸고 영양의 보고라고

할수 있다. 무우 시래기 나물, 된장 시래기국, 추어탕, 선지국, 비지찌개, 냉콩국은

대통령이 즐겨 찾던 건강 영양식 이었다. 특히 밀기울과 함께 빻은 밀가루로 만든

수재비는 몸에 좋기 때문에 여름에 자주 해드린 음식중의 하나였다.
  우리 내외와 친분이 두터웠던 청량리 위생병원의 조지 루 박사 내외로 부터 나는

많은 건강식과 식이 요법에 대한 좋은 책을 많이 얻고 조언도 많이 받았다. 루박사

내외는 안식교의 독실한 신앙인으로, 하루 두끼 식사를 하고 고기와 생선을 먹지않고도

단백질을 섭취하는 건강식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며느리에게 남편의 건강은 반 정도가 아내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는 머리를 차게 발은 따뜻하게 해야 좋다고 해서 겨울에는 남편의 구두를 따뜻

하게 관리해 신겨 드렸다. 식사는 기분이나 건강 상태에 맞추어 조리 방법과 식이요법

으로 조절해 드렸다. 내가 만든 영약식 외에 대통령은 약을 싫어해서 보약 같은 것은

먹지 않았다. 남편은 대통령직을 사임하던 해에 86세였으나, 그해 3월달에도 연날리기

대회에 하루 두번 씩이나 나가서 연을 날리고 연 싸움에서 이길 정도로 건강이 좋았다.
  4.19학생 데모를 무력으로 진압하자는 측근들에게 대통령이 '피를 흘려서는 안돼!

불의를 보고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국민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야지'하고 하야한 후, 무척 어려웠던 하와이 요양 시절 가난한 우리에게 5년 동안

무료 봉사를 해준 우리 교포 의사 토머스 민 박사가 남편의 유일한 주치의였다. 남편은

자신의 건강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의사가 최고라고 늘 자랑했다.

  나도 1970년 아주 귀국해서 중앙의료원 치과 과장이던 최상열 박사를 찾아가 의치를

만들었는데, 18년 이상 썼는데도 탈 한번 없이 편안하게 이 국산 틀니가 내 건강을 지켜

주고 있다. 지금 하나로 빌딩에 있는 윤내과의 윤해병 박사가 나의 건강 상담을 해주며

보살펴 주고 있다.

  이렇게 편하고 행복하게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지내는 여생이, 고생만 하다 하와이

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남편을 생각하면 내겐 과분하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