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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시골 노인으로 부터 받은 글

clara40 2019. 2. 16. 09:15


                시골 노인으로 부터 받은 글


         


  그믐이 되얏는가. 어리 중천에 초승달 걸렸는데,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무더기에 마음이 시리네.
  다들 여일허것지. 추석에 맏이네는 큰놈 중간고사라고 차례상

앞에 궁둥이 두어번 조아린 뒤 그 길로 내빼더니, 전교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렷다.
  둘째네는 보리와 콩도 분간 못 하는 코 흘리개를 데리고 명절에

구라파로 역사 여행 간다더니, 이순신 보다 나폴레옹 생애를 줄줄

외는 신동이 나겠구나.
  막내 며늘애는당직이라 우는 시늉을 하더니, 혹 몸져누운 것이냐.

요즘처럼 황망한 세상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삼 형제가 약속

이나 한 듯 감감하니 아비 어미 죽어 달포가 지나도 부고 낼 자식이

없을까 두렵도다.
  내 오늘 단톡을 소집한 것은 중차대히 전할 말이 있어서다. 너희

어머니, 즉 내 아내가 쓰러졌다. 당나라 군대에 쫓기 듯 차례상 걷기

무섭 게 달아난 자식들이 남긴 설거지와 빨래, 먼지 더미를 사흘 내

쓸고 닦더니, 새벽 녘 밭일 간다고 나서다 고꾸라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의사왈, 고혈압ㆍ당뇨갑상선 약을 달고 사는 노인이 끼니는

거르고, 중노동만 하니 몸이 배겨 내겠소?
  와중에도 자식들 심란하게 전화 걸지 말라 다잡는 너희 어미를 보며,

내 가슴을 쳤노라. 저 여자는 무슨 죄 있어 평생 구두쇠 서방 잔소리에

망나니 사내 자식들 키우 면서 쓰다 달다 말이 없는가. 제사도 1회,

명절도 1회로 줄였거늘 그 도 못마땅해 입이 댓 발 나온 며늘애들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저 여인은 바보인가 천치인가.
  두 늙은이 굽은 등 으로 다리 절며, 고추며 열무를 수확해 앞앞이 택배를

올려 보내도 고맙다 전화 한 통 없는 자식들은 원수인가 애물단지인가.
하여 결단했느니, 앞으로 우리 집안에 명절은 없다. 제사도 없다. 칠순이고

팔순이고 생일 잔치도 막살할 것이며, 어버이날이니 크리스마스니 하여

요란 떨 일은 더더욱 없다. 고로 상속도 없다.
  우리 부부 가진 거라곤 벼룩 콧등만 한 집 한 채뿐이나, 무덤에 지고 갈지

언정 너희한테 물려주지 않겠다. 군청 말단으로 취직해 봉급은 쥐꼬리만

하나 손끝 맵짜게 살림하는 여인 만나 아끼고 쟁여온 덕에 옴팡간 장만한

재산이다.
  이를 남김없이 갖다 팔아 바다건너라고는 울릉도 밖에 못 가본 저 늙은

아내와 세계 곳곳을 주유천하 하며 몽땅 써 버리고 죽을련다. 나의 아내

에게도 면세점이란 곳에서 외제 화장품외제 손 가방도 사줘 보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연애했다던 불란서 카페에 가서 쓰디쓴 커피도

한 잔씩 마셔볼 것이며, 천국과 한 뼘 거리라는 융프라우에 올라 온 세상

발밑에 두고 사진 한 방 멋지게 남겨 볼련다.
  우리가 돈을 쓸 줄 몰라 허리띠 졸라맨 줄 아느냐. 영어를 몰라 해외 여행

마다한 줄 아느냐. 한 치 앞 안 보이는 세상, 앞 길 구만리인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될까 이 악물고 살아온 죄밖에 없느니. 그런 우리한테

꼰대니 틀딱이니 손 가락질하는 인심이 기가 차기만 한데, 내 자식도 별수

없다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도다.
  내 비록 날샌 올빼미 신세이나 가장(家長)의 이름으로 남기는 마지막

부탁은, 부디 덕과 예로서 세상을 살거라. 의로운 것이 아니면 머리카락

올도 취하지 말고, 자식들은 재주보다 덕(德)이 앞서는 사람으로 키워라.
또한 아끼며 살거라.
  사람 잡아 가느라 온 나라가 시끄럽고, 권세가들 헛된 꿈과 아전들 잔꾀에

백성들 곳간엔 해 넘길 양식이 없나니, 밤낮 궁둥이에서 비파 소리 나게

놀러만 다니다간 쌀독이 바닥날 터. 사방에 승냥이 떼들 덤빈다고 분기탱천
하지도 말거라.
  적을 두려워 하며 대처하는 자는 이길 것이나, 세상에 나만 한 사람 없다고

믿는 자는 망하리라. 아닌 밤 홍두깨 유언에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낯빛

일것 없다.

  바람처럼 와서 구름처럼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 천지간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창공을 훨훨 나는 두 마리 학처럼 세상을 떠돌 것이니, 어느 날 우리

내외 부고가 들려와도 슬퍼하지 말거라.
  오뉴월 물 오이 처럼 쑥쑥 자랄 내 손주들 못 보는 것이 다만 애통할진저!
※ P.S : 여행 갈 때 등산복 좀 입지 말라고 눈 흘긴게 둘째더냐?
너희가 멀쩡한 바지를 찢어 입든 꿰매 입든 내 일절 참견하지 않았느니,

우리가 빤스만 입고 비행기를 타든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든 괘념치 말라.
  글 품새가 왜 이리 현란한가 물었더냐? 마음이 헛헛하여 '국수'란 대하

소설을 읽었더니 절로 되었다. 우리 말의 찬란한 보고(寶庫)요, 구한말과

다름없는 이 나라의 살길이 담겼느니, 일독을 권하노라.


[출처]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