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노후찬가 (老後讚歌) [유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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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년(老年)은 젊음보다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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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의 아침은 늦게 밝는다. 일흔여덟살의 영감과

일흔줄의 마눌이 사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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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길이 바쁜 직장인도, 학교에 늦을 학생도 없으니,

​동창의 햇살이 눈이 부실때 까지 마음놓고 잠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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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들면 초저녁 잠이 많아 ​저절로 아침형 인간이

된다는데, ​우리 내외의 수면 형태는 여전히 젊은이

같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마누라는 쿨쿨 자지만,

영감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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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든지 게을러도 괜찮은 나이. ​늦은 아침을

맞이할때 마다 나는 내게 찾아 온 노후를 예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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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준비도 간단하다. 잡곡밥에 된장국, 그리고 김치와

시골에서 가져온 푸성귀, 생선 한 토막이 전부다. ​마눌은

영감에게 초라한(?) 밥상을 내밀며, 자랑이나 하듯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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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粗食)이 건강식인것 아시지요?' 조악(組惡)한 음식

이라야 노후의 건강을 유지할수 있다는 핑계를 대며~

나에게는 조촐한 식단이 입맛에 맞는 일상의 식사로,

속으론 고마워하면서도 아직 내색해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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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늙었다는 것은 정말 편한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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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의 커피처럼 황홀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집의

소파가 놓여 있는 동쪽은 전면이 유리창인데, 찻잔을

들고 건너다 보면, 동쪽의 공원ㆍ야산ㆍ수목이 마치

내집 마당처럼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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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꾸는 수고없이 그 안에 가득한 꽃과 나무를

즐긴다.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누릴수 있는 많은것들,

분주한 젊은이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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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閑遊)의 복은 노후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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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신문을 본다. 주식 시장에 며칠 사이 수십조

원에 이르는 자금이 날라 갔다는 기사를 읽는다. 이익이

있는 곳이면 벌떼 처럼 모이는 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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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본다. 권럭을 잡기 위한 사투(死鬪)의 현장, 거기에

온갖 거짓과 뻔뻔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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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것이 ​내게는 어느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꿈인듯 허먕하다. 다만 젊은 후손들의 심사를 오염시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 못하는 세상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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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초연(超然)해 지는것이 ‘늙음’의 은총인가.

만용(​蠻勇)이 사라지고, 과욕(過慾)이 씻겨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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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어느 시기를 제일 좋은 때라고 말할수 있을까,

뛰어 놀고 공부만 하면 되는 어린 시절일까, 드높은 이상에

도전해 보는 열정의 청춘 시절일까, ​아니면 가정을 튼실히

이루고 사회의 중견이 되는 장년 시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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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고, 성취하고, 인정받는 이런 시절은 가히 황금기라

말할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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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좋은 시절에 나는 결코 행복하지도, 황금을

맛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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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대열에서 뒤떨어 지지 않으려 애쓰던 그 시절,

삶의 본질은 할 일 없는 자들의 주술(呪術)로 여기고,

앞만 보고 달렸기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았

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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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세월의 영욕(榮辱)속에 밀리고 밀려 추락의

끝이라고 생각한 ‘노후’ 라는 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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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豊饒)의 고장이었고, ​비로서 최선과

정도(正道)가 보이는 밝은 눈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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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서도 의무에서도 자유로운 나이,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묶이지 않는, 평화와 고요가 가득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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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할멈 둘이 사니, 우선 아늑하고 편안하다. 청소도

일주일에 한 두번 먼지 닦는 일만 거들어 주면 된다.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꼼지락 운동과 뒷동산

산보로 늙은 육신 보전하며 모자라는 삶의 공부도

보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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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면 여행ㆍ바둑도 하고, 고향 시골을 별장삼아

찾아보는 여유도 챙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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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ㆍ담배 즐기지만 아직 살아있음을 고마워 하면서,

​얼마 있으면 결혼 52주년이 되는 해이다. 늙어 무력

해진 영감과 나보다 훨씬 젊은 마누라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젊은 시절 한번도 나누어 보지 않은 정다운 눈빛

으로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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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손을 잡고, 어린 나이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한 마누라를 응시하며, 우리 내외

에게 살아 있을때 즐거운 노후를 허락하신 ​우리들

생명의 주인과 우리를 살게해 준 여러 인연들께 진실로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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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나이, 오늘 지금을

즐겁게 사는게 천당이고 극락으로 여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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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살아있음을 고마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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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선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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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6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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