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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16 - 호랑이도 제 굴로 돌아간다는데

clara40 2022. 2. 18. 11:25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오직 내 나라 땅을 밟아 보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살고있던 87세의 노인에게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앞날이

막막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1962년 초 대통령이 트리폴리 육군병원으로 부터 회복이 불가능 하다는 진단

결과를 통보 받았을때, 나는 아들 인수를 붙잡고 함께 울었다. 다시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는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에 주저 앉게 된 그때 처럼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암담한 때는 없었다.
  먼저 인수는 대통령을 위해 그래도 귀국의 길을 열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도 모를 단독 귀국의 길을 택했다. 그후 한국에서 리 대통령의 환국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당시의 정부가 막고 나서는데 그 실현

가능성이란 도무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우리는 지금도 그때 리 대통령의 환국을

위해 운동을 전개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귀국이 실현되지 못한 채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우리에게 동정을 표하고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중에도 모나라니 요양원의 원장 존슨여사는

대통령을 무료로 입원시켜 간병해 줄것을 제의해 와서 나는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

했는지 모른다.
  나는 1962년 3월22일자의 이 고마운 존슨 여사의 편지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요양원에는 우리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던 윌버트 최씨가 그 후원자로

있었고, 또한 대통령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며 교포 사회에 공헌이 컸던 민찬호

목사가 오랫 동안 요양했던 곳이기도 했다. 존슨 여사는 대통령을 잘 알고 있었고,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특히 민찬호 목사의 아드님

토머스 민 박사는 대통령이 별세하기 까지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모나라니

요양원을 오르내리며, 주치의로서 모든 편의와 도움을 무료로 봉사해 주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하야와 동시에 하와이에서 총영사직을 사임했던 오중정씨도

한결같이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는 1985년 광복 4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외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호놀룰루시 릴리하가에 있는 한인 기독교회

마당에 리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주관하였다. 이 교회는 리 대통령이

독립 운동을 위해 설립하였으며, 교포 사회에 있어 민족 정신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내가 존슨 여사에게 고마웠던 일은 모나라니 요양원에서 나에게 간호

보조원의 직책을 허락해 준 일이다. 이로써 나는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병원의

부속 건물 방에서 나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당시 정부와의 관계는 호놀룰루 영사관에서 두어 차례 화분을 보내온 것이

그 전부였으나, 독립 운동의 동지이던 교포들과의 관계는 한결 같이 다정스러운

것이었다. 최백렬씨와 김학성씨 내외, 최성대씨, 거투르트 리, 정순예 김, 살로메

한씨 등 기독학원 시절의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회 인사들의 위문 내왕이 잦았고,

대통령은 그들을 만나면 반가워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잠시도 귀국 일념을 버린

적이 없었다.
  하루는 존슨 여사가 여러 병실을 돌아 보다가 대통령의 병상이 있는 202호실에

들렸다. 병상에 누워 무엇을 생각하는데 여념이 없는듯한 대통령의 표정을 본

존슨여사는 '리 박사님'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며, '소원이 무엇이지요?'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아직도 리 박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계셔요?'하고 묻자,

'그렇소'하고 대통령은 대답했다.
  이때 인수가 하와이로 두번째 와서 대통령의 병상을 함께 돌보던 때였다. 늘

대통령의 머리 속엔 고향 산천의 풍경이 완연한양 한국에서 누가 오면, '지금도

서울 청량리 밖에는 누런 벼 이삭이 굽이치고 있는가? 언제 다시 그것을 보고

죽을 수 있을런지~'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어릴때 그곳에서 메뚜기를 잡고

남산에서 연날리기 하던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노인의 건망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어서 대통령은 으례 여비가 없어서

귀국을 못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매카키가에서 살 때에 돈을

아끼기 위해 이발도 안하고, 시장에서 사오는 식품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고 나와 인수를 나무랐었다. 대통령은 우리가 돈을 쓰거나 무엇을 사오면,

하도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금요일마다 1주일 먹을 식품을 구입해 오던 나는

늘 대통령이 신경을 덜 쓰게 하기 위해 조심을 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들 인수의 교육 문제를 걱정했는데, '저 녀석이 공부를 더

해야 할텐데 내곁에서 허송세월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늘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인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있었으나,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더 시킬 궁리만 했다. 인수는 겹치는 가사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늦게나마 공부를 계속하여 뉴욕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게된데 나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대통령도 천상에서 기뻐

하리라 생각한다.
  모나라니 요양원으로 옮긴 후 대통령은 잠은 잘 자는 편이 아니었으나, 식사는

여전히 잘 했다. 대통령의 병세로 고령의 노인에게서 보는 동맥경화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병상에 누운채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할 만큼 말도

하고 의식이 있었지만, 무척 힘드는 환자에 속했다.

  첫째로 대통령은 워낙 약을 싫어하는 성품이었기 때문에 약먹일 때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오랜 병상 생활에서 대통령은 힘이들면 '아이고, 아이고...'하며

괴로워 할때도 있었고, 한때 열이 심할때는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신음을

했다. 아침에는 사리에 맞는 말을 했지만, 흥분한 경우나 오후에는 우리 말로만

이야기하는 때가 많았다.
  주치의는 두부의 혈액 순환 관계로 정신 상태가 흐리며, 노쇠로 하체는 약해

졌으나 식성이 좋아서 비교적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병원

식사를 싫어했지만, 늘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다. 나는 대통령을 일으키거나

눕힐때는 '하나, 둘, 셋'하면서 힘을 주었는데, 대통령은 넌지시 나를 바라보며

힘을 덜어 주려고 애썼다. 나도 때로 고달프고 괴로울 때는 대통령과 함께 먼

한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리랑이나 나의 서투른 도라지 타령을 부르면서 위안

할 때도 있었다.
  병원 음식에 질려버린 대통령을 위해 그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열거하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 따라서 함께 부른적도 있었다 ;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아 된장찌개 된장국

  그 얼마나 오랜 세월 해외에서 대통령이 고향 음식의 맛과 고 향산천을 그리며

지내온 나날이었던가!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에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도 않았을때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싸우고 또 싸우다 죽을 것을 각오한

바이지만 단 한가지 조국의 산천과 겨례의 품안에서 죽게 되면 오죽이나 행복할까

하고 늘 생각했었다.
  1964년 4월 말에는 대통령의 별세 후를 생각하여 그 준비차 인수가 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5년 6월 말에는 인수를 다시 급하게 불러야만 했다. 대통령의

병세가 위독하기 때문이었다. 인수는 나와 함께 매일 대통령의 병상을 정성껏

돌보았다.
  그러나 7월 18일 밤 나와 인수는 대통령의 병상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숨결이 거칠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대통령이 이미 고통의 경지는 벗어났다는 것

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의 숨소리가 멎자 간호원은 임종임을 알려주었다.
  때는 하와이 시간 7월19일 1시35분 이었다. 유난히도 맑은 하늘에서 별빛이 초롱

초롱하게 비치는 밤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참으로 힘들고 슬플때도 많았지만, 대통령을 간호하며 함께 지낸 날들이 지금은 행복

하게 생각되고 그리워지기도 한다.
  병상에서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굴을 찾아간다는데~'하고 말하면서,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던 대통령을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오다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대통령이 나를 위해 지어불렀던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 속에 맺힌 한이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