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물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14 - 집 없는 나그네

clara40 2022. 2. 16. 13:03

이화장의 이 대통령 내외 침실


  정신적으로 몹시 큰 타격을 받았던 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지 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의가 있었다. 지금 여기에는 그 당시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알게될 날이 있을 것이다.
  5월 24일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씨로 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해 드릴테니, 하와이를 다녀 가시

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 전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5월 29일 상오 7시 우리는 이화

장을 출발했는데,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달 후에는 돌아 올테니 집을 잘 봐줘'하고 부탁했다. 김포 비행장

으로 가는 연도에는 평화스러운 초여름의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논에

가지런히 심어 놓은 모를 바라보며, 대통령은 풍년을 비는 시를 한 수 읊었다.
  공항에는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 차관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간 동안 기자들이 비행기 안으로 와서

회견을 요청했으나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기내에 세관원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소지품을 모두 검사했다. 우리의 짐은 전부 4개였는데,

대통령의 옷이 들어있는 트렁크 하나와 내 옷과 소지품을 챙겨넣은 트렁크

그리고 마실것과 점심과 약품이 든 상자와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였다.
세관원이 보지않은 것은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라이터였다. 그 라이터는

내가 이화장 현관을 나오기 전에 응실식 탁자 위에서 무심코 집어 넣은 것

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통령이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것을 집어 넣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 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 했고, 건강도 졸아지는 듯 싶었다.

우리는 조경 사업을 하고있는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

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석에 나가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 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한인 기독교회에 참석

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대통령은 옛날 이 교회 중앙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교포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늘 기도를 드렸었다.
  우리가 예정했던 하와이 체류가 한달이 지나자,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갈

생각으로 최백렬씨 등 우리를 초청해준 인사들과 상의를 하였으나 모두가

아직 좀 더 요양을 하시도록 만류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권고는

당시의 국내 사정을 알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이 당시 완전히 정치를 떠난

한 고령의 노인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대통령에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별장에서 한없이 신세를 질수는 없는 일이어서, 결국 윌버트 최씨와

옛 동지들이 호놀룰루시 매키키가에 우리의 주거를 마련해 주고, 생계도

보살펴 주게 되었다. 주거가 정해지자 옛 동지들이 쓰던 가구나 전기 밥솥과

찌개를 끓일 냄비며 김치와 한국 음식을 해 먹는데 필요한 그릇 등을 가져다

주어 우리 두 식구가 살수있는 간단한 살림살이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옛 친구들의 이와같은 호의와 주선에 감사했다. 이토록 우리를 보살

펴준 사람들 중에는 대통령이 경영하던 한인 기독 학원의 옛 제자들이 많았

는데, 그들은 대통령을 친 부모 이상으로 공경하며 사랑으로 받들었다.

  우리의 생활은 단조로왔으며,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 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다.
단 두 식구가 사는 간단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쉴새없이 일했다.

나는 집안 을 청소 할때 마다 창문의 유리를 두 장씩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하면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닦아야할 집안의 유리 창문은 모두 나의 손을

한번씩 볼수가 있어서 깨끗한 창문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은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 손질을 하며 마음

속의 시름을 달랬다.
  대통령은 이때도 무슨 음식이나 잘 들었고, 체중이 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항상 과식을 삼가하도록 배려했다. 체중이 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특히 노인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보행

운동을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하여 옥외로 함께 나가 산책을 했다.
  이렇게 1960년 한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자, 1961년 설날 나는 떡국을

끓여 대통령에게 아침 식사를 들게했고, 친지와 교포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세배를 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 주기도 했다.

  3월 26일 대통령의 생신날에는 하와이의 교포들이 탄신 축하의 모임을

만들어 대통령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날로 더하여만 갔고, 나라에 대한 걱정도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6대 독자인 자기 때문에 남달리 고생만 하시다가 멀리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는 아들을 그리다가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를

하면서, 대통령은 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구한말 구국 운동을 할때 쫓기던 몸이 되어 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불효자

임을 늘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새로 양자를 맞이할 것을 상의하였다. 누가 한국에

가서 이 어려운 일을 해줄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한 끝에 우리는 뉴욕에 있는

이순용씨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이씨는 대통령과 독립 운동을 했고

한때 내무부 장관을 지낸일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의 통지를 받자 곧 호놀

룰루로 와서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나에게 누가 아들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

하며 이순용씨의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대통령을 위해 양자를 구하러

한국에 왔던 이순용씨는 한때 정부의 오해를 받아 연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마침내 인수를 입양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양녕대군파 종친회의 추천으로 조카 뻘이 되는 계대를 맞춰 입양하게된 인수의

사진을 보게된 대통령의 표정은 하와이에 온 후 가장 밝은 것이었다. 대통령은

그날 부터 인수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수속상 시간이 걸리게 되자 '그 놈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할 것이 아닌가'하며 마음을 썼다. 이로써

대통령은 생활에 새 활력을 느끼며, 나에게 곧잘 농담도 걸어왔다. 종종 거울 까지

들여다 보며 젊은이 처럼 '그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이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드디어 1961년 12월 13일 대통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수가 도착했다. 대통령과

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지 않고, 집의 테라스에 나가 인수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어느덧 상기된 표정이었으며, 마당을 들어서는 인수를 바라보자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손을 흔들었다. 인수는 층계를 올라와 우리나라 재래식인 큰절을

했다. 대통령은 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첫 대면

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래 떨어져 있던 부자간 같이 다정하였다. 우리는 따라온 기자

들을 위해 사진을 찍도록 해 주었다.
  대통령은 곧 인수의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가지?'하고

물었다. 인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갈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그런가? 나라가 잘 되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야, 그런데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게 아니야'하고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침통해진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인수에게 뒷뜰이 보이는 마루방에 마련된

환영 식탁으로 어서 모시고 나오도록 했다. 우리가 아들을 맞는 경사에 친지와

제자들이 축하의 인사로 김치는 물론 고비나물 까지 한국 음식을 골고루 마련해

와서 우리가 매키키가에 살림을 차리게 된 후 조촐하나마 가장 큰 잔치가 벌어졌고,

나는 오랫만에 대통령의 즐거운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