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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13 - 따뜻한 온돌방이 좋아

clara40 2022. 2. 15. 14:22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후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걸어 갈 뜻을

결심하자 나는 경황 중에도 대통령이 경무대 뒷산을 산책할 때 신던 헌 신발을

신게 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찬장 서랍을 열고 대통령의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과 반쯤 남은 작은 찻병을 핸드백에다 챙겨

넣고 따라 나섰다. 이 차는 밀 껍질과 호밀의 겨를 함께 까맣게 볶아서 빻은

포스툼(postum)이라는 구수한 영양차인데, 미국 몬태너주에서 농사를 짓고있는

전인수씨 부인이 보내준 것이었다.
  전씨 내외는 대통령의 독립 운동을 도왔으며, 그들이 농장을 시작할 때는

대통령이 그곳에 가서 목수 일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 후 1941년 초에 전씨

내외는 대통령의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 한글 번역 : 일본 군국주의 실상)

출판을 위해 경비를 부담했다.

 

(9/6 친구님, <Japan Inside Out> 책이 필요 하신분은 저에게 연락 주시면,

PDF file을 email로 보내 드리겠읍니다. 태흠 드림)

  대통령은 보내온 그 차를 마실 때면 전씨 내외의 애국심과 그 성실하고 곧은

마음씨를 칭찬하며, 그 옛날 몬태너의 넓은 들에서 함께 목수 일을 하던 날을

회상하고 즐거워 했다. 나는 대통령이 여행을 하거나 낚시질을 하러 갈 때면,

이 차를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 김밥이나 샌드위치와 함께 가지고 따라 나섰다.

전인수씨 부인은 대통령의 하와이 요양 시절은 물론 타계한 후에도 줄곧 이

차와 함께 노인용 비타민을 나를 위해 보내 주었다. 부인의 뒤를 이어 야채

농장을 운영하고, 트럭 운전까지 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딸과 지금도 서로의

소식을 교환하고 있다.
  대통령이 영광의 자리에 있을때는 누가 참으로 진실되고 의리있는 사람인지

알기가 힘들었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인품이

곧고 바른 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통령의 고심을 이해 했고, 끝까지 의분심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있다.

  공직을 사임 했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서 집에 가겠다는 대통령의 생각은

경무대로 달려온 사람들의 만류로 그만두어, 결국 우리는 차에 오르게 되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고, 이화장 앞의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주었다. 대통령도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며 감격하여 눈시울이 젖어있었고, 나도 목이 메었다.

차에서 내리자 대통령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담옆으로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오!'하고 말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대통령은 한없이 서있고

싶어했지만 나는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무거운 짐을 벗게되어 편해지긴 했지만, 나라와 국민의 앞날을 무척이나

염려했던 대통령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공산당은 물론, 사사건건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대국들의 간섭과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떠한 곤경에서도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할만한 줏대있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화장에서도 대통령은 밤중이나 새벽이나 우리 민족의 살 길을 밝혀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토록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노인의 가슴속에 깊이 응어리진 슬픔과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채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한평생 온갖 역경을 도맡아 고난을 이겨내면서 너무도 많은 슬픈 일들을 겪으며

살아온 대통령이었기에 노경에 닥친 그 커다란 충격도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이

었지만, 곁에서 보기엔 너무나도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이화장의 생활은 경무대의 생활에 비해 시간적으로 좀더 여유가 있어 자유로웠고,

경무대의 낡은 다다미방 침실에 비해 온돌방의 아늑함이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것 같았다. 대통령은 나라 일 보는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게 되면, 그런데서

부정 부패가 싹트게 된다고하여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 수리도 지붕이 새는 것을

막는 일 외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경무대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은 일본식인 경무대의 방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국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다다미방인 침실을 우리가 입주한 뒤에도 개조하지 않았으며, 목욕탕만은

욕조가 너무 좁아서 욕조 한편을 파내서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었다.
  강석이가 양자로 왔을때도 우리 침실 옆의 방을 내주면서, 떨어진 다다미쪽을

대통령이 손수 수리를 했고, 감기 들까봐 문풍지만 부지런히 발라주었다.

그리고 이화장의 경우는 콜터 장군이 지낼 마땅한 집이 없다고 하여 빌려준

일이 있어서 온수를 쓸수 있는 등 콜터 장군에 의해 설치 된 몇가지 편리한

시설이 마련되었었다. 그러나 콜터 장군이 수리한 노고도 보람없이 좀 까다로

웠던 그의 부인은 겨우 두달을 이화장에서 살고 겨울을 지내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냉동 창고라고 혹평을 하면서 다른곳으로 이사해 버렸다.
  아내를 위해 너무나 애를 쓰는 콜터 장군을 가엾게 생각한 대통령은 넌지시

부인 길들이는 법을 장군에게 일러주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콜터

장군이 자기 부인을 위해 해놓은 시설은 내가 이화장 살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전력의 소모가 많은 것이 탈이었다. 다행히 콜터 장군

내외는 온돌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아궁이에 불만 때면 훈훈하고 따뜻한

아랫목의 재미를 대통령은 만끽할 수가 있었다.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지만, 때로 불안한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반공 포로의

석방으로 자유를 찾게된 청년들은 대통령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대통령은 여전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틈나는대로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

하고, 이화장의 창틀과 문짝들도 직접 연장을 가지고 손질했다. 나도 마음

속의 시름을 잊기 위해 가끔 현관앞 정원 한 모퉁이에서 은방울 꽃을 가꾸며

대통령이 나무를 전지하는 모습을 지켜 보기도 했다. 은방울 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대통령이 나를 위해 손수 심어준 것이었다. 그 꽃은 지금도

해마다 그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 마음을 위안해 주고 있다.
  하루는 집안 조카뻘되는 이갑수씨 내외가 이화장으로 대통령을 뵈러 왔을때,

돌계단 위의 나무를 손질 하면서 '이제는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곧 일본 사람

들을 끌어 들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하면서 대통령은 무척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한 후 그들의 노예 근성을 뽑아

버리기 위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얼마나 애썼는가를 대통령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후 귀국하여 대통령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 하면서

'주님이 너희를 자유케 하였으니 두발로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을 젊은 동포들에게 자주 일러주었다.
  우리가 이화장으로 옮겨온 후 더 자주 만날 수 있게된 친척들은 생일이나

명절때만 해 왔던 음식들을 대통령을 위해 만들어 왔다. 경무대 시절에는

대통령이 좋아하는 식혜를 내손으로 만들었는데, 친척들이 만들어 보내오는

바람에 내가 만들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한번은 오후의 산책을 마치고 정원의 벤치에서 대통령과 함께 냉수를 들며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을때, 을생이라는 대통령 큰 누나의 손녀딸이 대통령이

좋아하는 튀각을 해가지고 찾아 왔었다. 을생이는 중년 부인이었는데, 대통령이

열심히 듣고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더니, 대통령에게 '할아버지, 그 라디오

저 주세요'하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 라디오는 할머니한테 물어 봐야해'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어떤 것이나 거의 내 의사를 물어보는 법이 없이 주어버리던 대통령이

처음으로 아내인 나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고맙기는 했지만, 어딘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 라디오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대통령에게 필요한 물건이 되어 줄 수가 없노라고 거절했었는데, 늘 마음에

걸렸다.
  일요일에는 정동 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에배를 보았다. 이화장에서
대통령의 일상 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한 두 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