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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11 - 옥고 이겨낸 구국 일념

clara40 2022. 2. 13. 10:48

              프란체스카 여사

  지난번 나는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젼을 통해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보았다. 천하장사 이만기 장사와 이준희장 사의 멋진 승부를

보면서, 남편이 자랑하던 대로 역시 한국의 씨름이야 말로 문화 민족만이 가질수

있는 특수한 경기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서로 존중하면서 신사적으로 힘과

기를 겨루는 참으로 멋진 모습이었다.
  가끔 마당에서 우리 손자들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씨름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할아버지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대견해 하고 기뻐하실까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본다. 어려서 부터 씨름, 연날리기, 썰매타기, 사방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등 안해 본 놀이가 없었던 대통령은 심지어 남사당패들을 따라가

광대 놀음까지 즐겨 구경했는데, 그 때문에 엄한 부모님에게 꾸중도 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 우리가 마포장에서 살때 남편은 시인 서정주씨에게 자기의 어린시절

얘기를 들려주며, '사당패 돈이야!'하고 흥을 돋구는 남사당 놀이 흉내까지 내면서

열심히 설명해 준 적이 있다. '남사당 놀이는 퍽 재미있었지. 그 남사당패들은

퍽 행복했을거야!'하며 남편은 사뭇 감탄조로 얘기해 주었다.
  하와이에서 동포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치고 민족의 얼을 심어주며

독립 운동하던 시절, 대통령은 애들에게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놀이 부터 가르쳤다.

하와이섬의 숲과 들에서 홀라춤을 추며 원주민에게 동화되어 가는 어린 동포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대통령은 동포 어린이들을 한국 기독학원으로 모아들였다.
  대통령은 골목 대장 처럼 어린 동포들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개구장이 꼬마

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꼬마들을 불러모아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나

숨바꼭질을 할때면, 재미있는 우리말로 어린 동포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대통령

술래노릇도 했다. 동포 어린이들과 함께 뛰어놀 때는 어른이 어린애 처럼 잘

어울렸다.
  우리나라 체육 발전과 올림픽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던 정월터 선생도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우리 말을 배우며 대통령으로 부터 연 날리기와 씨름과 제기

차기 같은 놀이를 배웠던 꼬마 선수였다. 동포 어린이들은 대통령만 보면 '흥부와

놀부'ㆍ'바보 온달과 평강공주'같은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서 매달렸다.

특히 김치 할머니로 알려지고 한국에 자주와서 좋은 일을 했던 유헤나 여사도

어렸을 때 하와이에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가장 많이 졸라댔던 학생이었다.
여자 어린이들은 나라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푸른 강물에 몸을 던졌던 3천 궁녀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헤나 여사는 한국에 오면 꼭 낙화암을 찾았다.
  대통령은 남자 어린이들과 팔 씨름을 자주 했는데,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마지막

역전승을 시켜주어 사기를 올려주었다. 사실 대통령은 팔 힘이 굉장히 센 편이었다.

청년 시절 부터 줄곧 장작을 패고 목수 일을 즐기며, 나무를 손수 가꾸고 전지해

주는 등 팔 운동을 쉬지 않고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워낙 팔 힘뿐만 아니라 기운이

좋아서 붓글씨를 하루 종일 연습해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악수를 많이 해야 했던 은사인 윌슨 대통령으로 부터 대통령은 손을 건사

하는 법을 배워서 나에게도 가르쳐 주고 김활란 박사나 임영신 여사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더운 때는 손을 펴서 무릎 위에 올려 땀이 나지않게 하고, 추운 때는 엄지

손가락을 주먹안에 넣어 꼭 쥐고 있으면 손이 차지 않았다. 이것은 상대방과 악수

할때를 생각해서였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손과 발을 잘 위해 주어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대통령의 손은 온갖 일을 가리지 않고 그토록 열심히 일 하는데도 유난히 부드

러웠다. 다만 몹시 화가 나면 손 끝을 후후 불어대는 습관이 있었는데, 서소문의 흙

감방에서 손 끝 마다 대나무에 꽂혀 고문 받던 때의 고통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끼니마다 잡곡으로 된 주먹밥 한 덩어리와 콩나물국만 먹으며 7년에 걸친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괴로웠던 일은 여러가지 잔인한 형벌을 받은 뒤 살인범과

중죄수만 가두는 흙 바닥 감방에 갇혀 있을 때였다. 손발에 족쇄를 채웠고 목에는

칼까지 쓴 채, 살인 강도들과 함께 웅크리고 앉아서 사형 당할 날이 오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어두운 흙 바닥 감방은 비 내리는 날엔 심한 습기를 견디기 어려웠고,

석양이나 새벽이면 죄수들은 통곡을 했다. '선생님, 나 같은 것은 죽으면 지옥에나

가겠습죠?'하고 묻는 사형수가 있었고, 밖에서 덜커덕 문여는 소리가 나면 '선생님,

이제는 내 차례지요?'하면서 대통령에게 매달려 비지땀을 흘렸다. 같은 사형수의

처지였지만 대통령은 그들을 편안하게 위로하려고 정성을 다했다.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남편은 재임시 감옥의 죄수들에게 남다를 관심을 보였고,

사형 서류에 도장 찍는 일을 제일 꺼리고 싫어했다. 조용히 죽을 각오를 하고 있을때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의지할 곳 없는 늙은 아버지와 처자식 그리고 동지들과

헐벗고 몽매한 동포들의 일이었다. 대통령은 자신이 그토록 고생하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었다.
  어느날 아침 같은 감방의 늙은 죄수가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가 신문을 들여 왔는데,

채규상이라는 분이 쓴 글에 '죄수 리승만은 이 나라에서 누구보다 애국자이니 그를

죽이려거든 나를 대신 죽게 해 달라'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이토록 자기를 동정하는

알 수 없는 벗의 정의에 감동되어 대통령은 북맏치는 설음에 잠겨 소리없이 울었다.
  그런데 밖에서 문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승만아'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내 자식의 시체를 어서 주시오! 어젯밤에 처형

됐다는 말을 듣고 왔으니 어서 내놓으시오.' 아들이 처형당했다는 오보를 듣고 옥리

에게 사정하는 늙은 아버지의 비통한 음성을 들으며, 대통령은 그만 가슴이 내려앉아

칼 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 늙은이가 돌았나? 처형은 무슨 처형이요? 당신 아들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으니 염려말고 어서 가시오!'하고 옥리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버지'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아버지!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

안심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하고 외쳤다. 그러자 밖에서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는데, 덜커덕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 뒤에도 가족들이 찾아와서 담 밖에서 목메이게 부르는 음성이 아픈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 때로는 면회도 허용되었다. 멀지않아 처형될 몸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 보다 가슴 아팠던 대통령은 어차피 죽을바엔 빨리 죽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심정이었다. '제발 천주학은 하지말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 들이지 않았던 대통령은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오 하나님! 나의 나라를 구해주시고, 내 영혼을 구해 주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대로

대통령은 자신의 나라와 영혼을 구하기 위해 고난의 일생을 살고 갔다. 형장으로

끌려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대통령은 아버님께 올리는 유서를 썼다. '불효한 자식하나

안두신 셈 치시고 부디 잊으시옵소서' 이렇게 써서 교수대로 나갈때 옆 사람에게 주어

전하도록 몰래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해질 무렵 감방 문이 열리며 형리가 나타났다.
'이제는 틀림없이 내 차례로구나!'하고 재빨리 옆 사람에게 유서를 전한 다음 무심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형장으로 끌려간 사람은 유서를 받아 지닌 늘 저숭길을

걱정하던 강도였다. 그토록 자기를 의지하며 뉘우치던 강도가 그 유서를 지닌채 처형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통령은 같은 감방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지들이나 죄수들과

헤어질때가 퍽 괴롭고 고통스런 순간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같은 사형수의 처지에 있는 대통령이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듯 대통령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끌려갔는데,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쳐 주는 것이 위로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무거운 칼 소리가 들려올 때의 그 복잡한 심정은 이루 표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존경했던 장호익 장군도 자기의 감방 뒤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는 세 번째 칼 소리가 날때가지 계속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애국자

장호익 장군의 죽음을 대통령은 늘 기억하고 있었다.
  7개월 동안 칼을 쓰고 사형수 감방에 있다가 유기수 감방으로 옮겨진 대통령은 그후

감옥의 애국 동지들과 함께 죄수들에게 공부도 가르쳤고, 감옥 안에 도서관을 설치할

때는 목수일을 했었다. 감옥에 콜레라가 돌아 4~5일 동안에 60여명이 옆에서 죽어갈

때는 밤을 새며 환자들을 돌보고 위로해 주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죽어가는 사람과

호흡을 함께 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주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

지만 홀로 건강을 잃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역시 본인의 의지와 하나님의 가호

라고 생각된다.
  대통령은 사형수의 형틀을 쓰고 있을 때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공부를 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쓰나?'하고 옆에서

물으면, '죽으면 못쓰더라도 산 동안은 할건 해보아야지.... 혹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르

니까'하고 태연히 대답하며 영한 사전을 집필했으니, 고생스런 감옥에서도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얻어 심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질 때 사람은 노력을 하게 되고 마음과 몸의 건강도 지켜지기 마련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