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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8 - 치아 좋은건 김치 덕

지난 3월 26일은 남편 리승만 박사의113회 생신 날이다. 남편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에서 한학자이셨던 아버님 이경선공과 당시 여자로는 드물게 학문을 익히고, 이씨 가문에 시집오셨던 어머님 김해 김씨 사이에서 1875년 3월 26일에 태어났다. 이 해는 고종 12년으로서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앞 바다에 침입하여 포격과 약탈로서 우리나라를 유린하던 해였다.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에는 위로 딸이 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후에 마마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데다가 어머님은 자꾸 나이가 드시니 걱정이 많았 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님이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당신 가슴에 뛰어 드는 꿈을 꾸고나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님은 남편의 아명을 승룡 이라고 했다. ..

사진/인물 2022.02.10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7 - 현미떡국과 건강차

아들 이인수, 며느리 조헤자, 두 손자와 함께 이화장에서 (1981) 74세때 대통령직을 맡았던 남편이었지만, 대통령 주치의는 따로 없었다. 대통령은 여든두살때 그 높은 북한산 꼭대기 까지 걸어 올라가서 문수사를 찾아가 '문수사'라는 휘호를 쓸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에 남편이 병원과 의사의 신세를 졌던 일은 별로 기억이 안난다. 다만 남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이화장에서 우리는 이기붕씨의 소개로 당시 이화대학 부속병원 의사였던 손창환박사를 알게 되었다. 손박사는 이기붕씨의 위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주었던 훌륭한 의사였다. 대통령 보다는 오히려 내가 손박사의 진료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1953년 11월 27일 장개석 총통의 초청으로 자유 중국을 방문했을 때와 1954년 7월 2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

사진/인물 2022.02.09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6 - 모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인물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미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 운동하던 시절, 우리는 독립 지도자의 체면에 알맞는 호텔에 유숙했지만, 식비는 아껴야 했다. 영양가 높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바나나가 미국에서는 값이 쌌기때문에 우리는 주로 바나나와 날 달걀로 끼니를 때웠다. 날 달걀을 먹을 때는 껍질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종이에 싸서 버렸다. 날 달걀을 먹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서양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6.25 동란때는 일선 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에 갔다가, 끼니를 놓쳐서 종종 굶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호주머니 속에 잣을 넣어드려 시장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6.25 동란이 났던 1950년의 추석날 에는 청도 피난민 수용소와 경산 전재민들을 방문했는데, 명절 날이니..

사진/인물 2022.02.08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5 - 경무대의 단골 메뉴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내가 아내로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첫 월급을 받았을 때였다. 그 때 남편은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글씨도 함께 써 주었다.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 분수에 맞는 검소한 생활을 즐기고, 일하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이 담긴 이 붓글씨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남편의 대통령 재임시 경무대에서 식사는 주로 내가 마련했고, 우리의 내의와 양말도 꼭 내손으로 빨았다. 남편의 뜻에 따라 비싼 고기류는 명절과 축일 또는 손님 접대할 때만 사왔다. 대통령은 보통 가정의 평범한 음식인 물김치, 콩나물, 두부, 김, 된장찌개, 생선구이 같은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집의 단골 반찬은 이런 정도였다. 지금도 우리집에서는 콩나 물..

사진/인물 2022.02.07

[인물] 프랜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4 - 날 된장에 밥 한 그릇

프란체스카 여사 결혼후 나는 맨 처음 남편의 짐을 챙기면서 "어쩌면 남자가 이렇게 꼼꼼하고 알뜰한 면이 있을까?" 하고 속으로 놀랐다. 밤낮 바쁘게 돌아다니며 한평생 독립 투쟁을 해온 외통이 나그네의 짐이라 초라하긴 했지만, 너무도 깔끔하고 단정했다. 결혼후에도 "내 짐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테니 염려말라"고 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귀찮게 생각할 정도로 남편은 혼자 사는데 익슥해 있었다. 연애 시절 남편은 나에게 "과부 주머니에는 은이 서말이고, 홀아비 주머니 속에는 이가 서말"이라는 한국 속담을 가르쳐 주면서 자기 주머니 속에 담고 다니던 작은 참빗을 꺼내어 보여 주며 "이것이 내 전 재산이오."하고 진지하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당시 내 빈 주머니를 보여 주면 현명한 여자는 달아날 줄 알았는데, 내..

사진/인물 2022.02.06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3 - 가난한 독립 운동가

프란체스카 여사 사업가 집안의 막내 딸로 자란 나에게는 낯선 미국에서의 궁핍한 결혼 생활이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것이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남편은 언제나 그분 특유의 유머로 사람들을 곧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가였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이며,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먹는다'는 한국의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던 남편으로 부터 나는 가난한 생활을 품위있게 이겨내는 지혜와 절도를 배웠다. 한국 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 면에서 남 모르는 내핍 생활을 지속했던 독립 운동 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 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

사진/인물 2022.02.05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2 - 신혼시절

지금 와서 회상해 보면, 우리들의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온 민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독립 투사의 국제 결혼에는 남다른 어려움과 말 못할 사연이 많았다. 특히 결혼 직후 나를 가장 서글프게 했던 일은 하와이 동포들이 나의 남편 에게 '혼자만 오시라'고 초청 전보를 보내왔을 때였다. 그분을 보필했던 동지 들이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두번씩이나 보내 왔을때 나는 수심 가득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는 남편은 하와이 여행에 서양 부인인 나를 동반해 주었다. 남편은 하와이로 가는 배 안에서 몹시 마음을 죄고 있는 나에게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 줄 동지가 아무도 없겠지만, ..

사진/인물 2022.02.04

[인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1 - 첫 만남

내 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 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될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 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 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 전시관과 기념 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 장..

사진/인물 2022.02.04